[Opinion] 왜 말을 못하냐는 이에게 [예술철학]

말이면 다인 줄 아는가, 말 같지 않은 말도 많단다
글 입력 2016.07.21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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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쌍의 연인이 벤치에 앉아있다. 남자가 옆에 앉은 남자에게 지그시 속삭인다. 사랑해. 옆에 앉은 남자는 빙긋 웃으며 짓궂은 질문으로 답한다. 얼만큼? 남자는 고민한다. 남자가 아는 범위 내에서, 지금의 마음 상태를 설명할 수 있을 법한 언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상황을 바꿔본다. 한 연인이 벤치에 앉아있다.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옆에 앉은 남자에게 화를 낸다. 옆에 앉은 남자는 남자의 등짝을 때린다. 남자는 옆에 앉은 남자에게 묻는다. 대체 뭐가 그렇게 화가 난 건데? 옆에 앉은 남자는 고민한다. 그가 아는 범위 내에서, 지금의 마음 상태를 말 해줄 법한 언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예술이 발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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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저서 ‘논리-철학 논고’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단지 그것들은 보여질 수 있을 뿐이다” 그에 의하면, 언어의 한계 밖, 다시 말해 세계의 한계 밖에 있는 것은 세계 내의 표현으로 왈가왈부할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들은 말해질 수 없고, 단지 보여질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말해질 수 없는 영역에 속하는 것들로 종교, 형이상학, 윤리학, 예술 등을 꼽았다. 이것들은 말해질 수 없고 단지 보여질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미적인 것에 대해 우리가 뭔가 말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헛소리(nonsense)로 증발하기 쉽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렇게 형이상학적 명제들이 논리적으로 번역되는 것을 넌센스로 갈무리하고 철학계를 떠났다. 그러나 말년에 스스로가 앞서 언급한 주장을 일부 비판하고 수정한다. 확실히, “잘 모르면 그냥 입 다물고 있어”라는 식의 주장은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한계 밖,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사소통 체계의 한계를 지적한 그의 통찰은 분명 곱씹어볼 만하다. 그의 초기 사상을 집약한 ‘논고’부터 말년에 사상을 정리했던 ‘탐구’까지, 그는 보다 엄밀하고 정확한, 적확한 언어적 의미에 무뎌지는 것을 모든 현상과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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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심리학은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우뇌와 좌뇌의 기능으로 설명한다.


 인간이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면, 논리와 감각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이성적 사유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감성적 직관을 통해 세상과 공감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논리의 영역에 기반을 둘 때가 많다.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논리적으로 글을 쓰고, 말을 하고, 의견을 전달하는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세계는 논리와 이해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영역이 존재한다. 그 미묘한 지점에서,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지점에서, 논리로서의 언어가 사멸하는 자리에 예술이 태동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반드시 글을 쓰고 말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언어 문명권에 속한 현대인들의 고정관념인지도 모른다. 언어 문화가 발달하기 훨씬 이전에 인류는 그림이나 춤, 노래를 통해 서로의 생각과 느낌을 주고 받았다. 선사 시대 유물에 발견되는 벽화나 상형문자의 기원 등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말할 수 없는 지점, 이를 테면 감동, 감정, 감성 등을 말로 표현해내지 못해 답답해하는 현대인들에게 우문현답이 된다. 말할 수 없다면, 그리고, 춤추고, 노래하고 예술을 하면 된다.

 아울러 언어 자체도 논리의 영역에서 감각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가치를 지닌다. 시나 소설 등의 문학은 언어를 가지고 논리로서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대해 공감하려는 노력의 단적인 예로 볼 수 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정이나 상황을 언어로 직조하여 그려내는 이를 우리는 시인이라고 부른다. 섣부르게 한 문장, 한 단어로 말할 수 없는 시간들을 이야기로 풀어 인물들로서 노래하는 이를 소설가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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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의 배반>, 1929
: 파이프를 그린 그림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고 함으로써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적 모순을 드러낸다.


 이해를 위한 글은 분명 인류 문명에서 효율적인 정보 교환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수준에서의 정보 교환을 의미할 뿐 근본적으로는 언어적 한계를 내포한다. 즉, 서로 다른 두 종류의 표현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데도 불구하고, 한 표현의 사용을 다른 종류의 표현에 동화시킨다거나, 어떤 표현을 그 정상적인 사용의 맥락을 떠나서 추상적으로 이해하려고 시도하기 쉽다. ‘사랑’을 포함하여, ‘아름답다’, ‘좋다’ 등의 언어들이 대표적이다.

 처음에 제시된 상황으로 돌아가본다.(여기서, 우리의 언어로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을 남자와 남자를 마주한 남자로, 다른 주체로서 구분하는 것조차 번거로움을 느끼게 된다) 남자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남자를 마주한 남자는 화를 내고 싶은 연인에게 시를 읊어준다. 뭔가 말하기에 어려운 것, 어떻게 표현하든 넘치거나 부족한 것 같은 순간. 보다 정확하게, 보다 적절하게 말하고 싶다면 다르게 얘기 해보자. 그리거나, 노래하거나, 춤추거나, 시를 지어보는 등으로.


[최연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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