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나요? 영화 뷰티인사이드 [문화 전반]

글 입력 2016.07.11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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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엇'을 사랑하나요?

뷰티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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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뷰티인사이드 포스터를 처음 봤을 때, 저는 '이 영화는 절대 보지 말아야지'하고 다짐했었습니다. 여러배우들을 세워놓고, 감성적인 문구(사랑해, 오늘의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를 적어놓은 모습이 곱게 비춰지지 않았거든요. 또 하나의 스타캐스팅의 영화가 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 된 후, 저 스스로가 엄청난 편견에 휩싸여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스타캐스팅을 이용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거든요.

 뷰티인사이드는 잠을 자고 일어나면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제목인 ‘뷰티’ 인사이드, 때문에 자칫 이것을 ‘미’에 관련한 사랑이야기로 생각하기 쉬운데 뷰티인사이드는 ‘사랑’ 그 자체에 대해서 얘기 합니다. 뷰티, 즉 ‘미’를 넘어서 성별 등의 ‘육체적인 특성’들을 넘어서, ‘실재하는 육체’와 사랑과의 관계에 대해서 고찰하게끔 합니다. 즉, 뷰티인사이드는 ‘육체’와 ‘정신’을 분리해서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지만, 영화 내에서 ‘정신’과 ‘육체’는 다른 층위를 갖게해 ‘정신’에 집중케 만듭니다. 실체가 없는 ‘육체’에 집중하면 결국 주인공 그 자체를 알 수 없게 되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 또 여주인공은 ‘육체’에 현혹되기도 합니다. 감독은 이런 관객과 여주인공에게 동조하면서, 또 스스로 육체에 현혹되기도 하면서도 ‘육체’에 대한 이러한 편견을 깨부수고자 노력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일반적으로’ 중시 되는, 여러 ‘육체적’ 측면에서 뷰티인사이드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일단 ‘뷰티’인사이드에서 가장 대표적이었을, "외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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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것보다는 잘생긴 게 낫고, 나이가 많은 것보단 어린 게 낫고. 
기왕이면 키 크고 멋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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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니가 어떤 모습이어도 상관없어. 매일 다른 모습이어도 괜찮아.
 다 같은 너니까. 난 네 안의 김우진을 사랑하는 거니까.”


제목부터 드러나듯, 감독이 제일 노렸던 부분이 이 부분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영화 속 김우진은 잘생기기도, 예쁘기도 하다가 못생겨지기도 합니다. 미의 기준은 주관적이지만 ‘보편적 미’로 생각하기에 김우진의 외관은 아름다웠다, 아름답지 않았다 합니다. 다 스스로의 모습이면서도, 김우진은 본인의 모습에 대해서도 ‘괜찮음’과 ‘괜찮지 않음’을 판가름 합니다. 이수에게 고백하러 가기 위해 ‘잘생긴 모습’을 기다렸던 것 등에서도 이를 알 수 있죠. 하지만 이수는 그런 모든 우진의 모습을 사랑해 줍니다. 대머리였던 우진의 머리에 자신 이름으로 문신을 새기며 함께 즐거워하거나, 오늘은 아저씨네? 하면서 웃거나하는. 수많은 ‘우진’들의 모습과 함께 찍은 ‘오늘은 여기까지’ 영상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매일매일이 다른 우진의 모습을 이수는 낯설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사랑해주었습니다. 외려 우진과 크게 다툴 때를 서강준 배우나, 이동욱 배우 등 흔히 ‘잘생겼다’고 불리는 배우들이 연기했죠. 즉 이수는 뷰티인사이드. 이수는 우진의 내면을, 내면의 미를 바라보았기에 외면의 미는 중요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모습에선 이쁘게 사랑하고 아름다운 모습일 때 싸우는 것도 가능했던 것이죠. 외면의 미를 뛰어넘은, 그저 ‘내면’만을 바라본 사랑. 감독이 그려내고자 했던 우진과 이수의 사랑은 그런 것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한계는 존재합니다. 이수와 첫 교류부터, 감정싸움, 베드씬, 프로포즈, 재회까지.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장면은 모두 아름다운 남자배우들이 연기했으니 말입니다. 심지어는 꽤나 비중을 차지하는 장면에서 ‘여자’ 모습일 때조차도 천우희, 우에노 주리, 고아성 등 아름다운 배우들이 출연했으니. 말로는 ‘뷰티인사이드’라고 하면서, 실제론 ‘뷰티 아웃사이드’ 아니냐는 비판을 들을만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뷰티인사이드는, 외면을 뛰어넘는 사랑을 말합니다. 비록 감독과 ‘감독이 상정한 관객’은 시각적인 미의 현혹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그러한 연출이 나왔지만, 우진과 이수의 관계 자체로만 보면 그 둘은 우진이 할아버지든 어린아이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그저 사랑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한계에도 불구하고, 뷰티인사이드는 외면을 뛰어넘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말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론 "성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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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되고, 미친소리 같다는 거 알아요. 아는데…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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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すきだよ。"(좋아해요.)


 뷰티인사이드의 주인공은 김우진이라는 ‘사람’입니다. 자아가 남자이긴 하지만, 차마 '남자'라고 부르기가 애매한 이유는 이 사람이 바뀌는 '다른 모습'의 범위가 성별까지 넘나들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은 젊은 남자였다, 어느 날은 할머니였다, 또 어느 날은 일본 젊은 여자였다 하는 삶은 그를 '그'라고 칭하기 애매한 위치로 만듭니다. 하지만 그 자체는 '남자'로 자아가 확실하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아무런 무리 없이 그를 '그'로 바라보기에 저 또한 '그'라고 부르겠습니다. 매일 자고 일어나면 모습이 바뀌는 이를 이해하고, 또 사랑해 줄 사람은 흔치 않기에 그는 항상 혼자 지냅니다. 엄마와, 친구인 상백이를 제외하고서는 맺는 관계라곤 원나잇 정도. 하지만 영화의 당연한 문법대로, 이렇게나 특별한 '그'도  이수라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됩니다.

가구가게의 점원으로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도 항상 웃는 모습의 그녀라서 반했다는 그. 결국 '잘생겼을 때'의 모습으로 그녀에게 접근해 3일간 밤을 새 그 모습을 유지하며 그녀와 데이트를 하지만. 결국 그는 잠이 들고, 그녀와 데이트를 했던 '김우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결국 그렇게 그녀를 포기하려던 '그'는, 다시금 그녀에게 접근하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때의 모습은 젊은 '여자'입니다. 그는 그 모습으로 그녀에게 다시금 고백을 합니다. 이에 혼란을 느끼고 그녀는 도망을 갑니다. 하지만 그녀는 고민 끝에 다시금 그를 만나기 위해 그를 찾아옵니다. 또 얄궂게도, 이때의 '그'는 일본인 '여자'입니다. 결국 ‘그녀’가 ‘그’를 받아들일 때의 모습은 모두 ‘여자’였던 것이죠. 하지만 관객들은 이에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합니다.

처음 그녀가 ‘그’를 만났을 때 남자였을 지라도, 그녀가 그를 받아들였을 때는 ‘여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습니다. 혹시 자신이 레즈비언이 된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워하지도 않죠. 남자로서 그를 처음 만났고, 남자로 인식했기에 아무리 ‘여성의 신체’를 하고 있더라도 그를 ‘남자’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별’에 관한 ‘사랑’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 혹은 ‘그 사람이라서 좋아.’ 이 말에, ‘성별’에 대한 가치가 담겨있을까요? 우리가 그 사람을 사랑할 때, ‘남자’기에 사랑한 것일까요? 혹은 ‘여자’기에 사랑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 자체’의 범주에 ‘성별’은 포함되어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뷰티인사이드의 상황으로 들어가 보면, ‘신체’적으로 위의 그 상황은 동성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체와 정신을 복합적으로 보면, 트랜스젠더(정신은 남성이지만 신체는 여성)와 한 여성입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대부분의 관객들은. 또 ‘그녀’는 이러한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이 상황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데요. 첫 번째론 ‘어차피 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현재는 여자일지라도 언젠가 남자의 신체로 돌아갈 것이기에 그저 김우진을 ‘남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죠. 두번째론 영화가 계속해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육체’가 아닌 ‘정신’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감독의 영화에서 ‘그녀’의 눈에 김우진은 신체의 성별이 어떻든 본인이 ‘남성’이란 자각을 가진 ‘이성애자 남성’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레 ‘그’와 ‘그녀’에게 이입하며 보는 관객에게도 적용 됩니다.

 두 번째 해석인 이 영화 내에서의 시각으론,  정신적으로 분명한 남자인 그에게 그의 ‘신체’는 중요치 않아진다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신체에 얽매이곤 합니다. 그런 시각으로 봐도 어쨌든 보여지는 것은 트랜스젠더, 혹은 레즈비언이죠. 이런 시점으로 볼 때, 영화 ‘뷰티인사이드’는 성별을 초월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 사람의 신체적 ‘성별’이 어떻든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으로 그것마저 안고갈 수 있는 것이죠. 만약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그 사람 자체가 좋아‘라고 했다면 ’그 사람‘이라는 범주에는 성별이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약간의 한계는 존재합니다. 실제로 저 두 씬에서는 이 둘 사이에 어떠한 스킨십도 없었고, 이 둘이 본격적으로 사랑을 시작하기 전입니다. 실제 이 둘이 사랑을 하고 있는 모습은 모두 ‘남자’의 신체를 가진 김우진으로 나오죠. 아무래도 감독도, 관객도 아무래도 내재되어있는 ‘당연함’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미’에 국한 된 범주로만 사랑을 논할 것이었다면 김우진의 변화의 범위에 굳이 ‘성별’이 들어갈 필요는 없었겠죠. 국적과 노소만으로도, 충분히 ‘미’는 달라지니 말입니다. 또한,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본 우리가 여자의 신체를 가졌을 때의 김우진과 그녀는 서로 사랑하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영화는 (크게 의도하진 않았더라도) ‘성별’을 초월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론 "육체 그 자체"입니다. ‘실체’가 있는 육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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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제 손을 잡아서 쳐다보면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절 보고 웃고 있어요. 그럼 저도 그냥 웃어요. 
익숙해지려면 하루가 너무 짧아요. 그 사람이 저를 만질 때. 
이 사람이 맞다, 이 사람이 맞다, 이렇게 생각하고 봐요. 잘 모르겠어요. 
그럼 눈을 감고 그 사람을 느껴봐요. 그럼 마음이 놓여요. 
제가 점점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요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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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어디 갔었는지, 뭘 먹었는지 
같이 갔던 식당 반찬까지 다 기억나는데…그 사람 얼굴이 기억이 안 나…….”


앞서 두 사랑에 대해서는 저 스스로가 ‘저런 사랑도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기에, 영화 속에 드러난 모습을 ‘이런 사랑이다’하고 정의했는데요. 이번 범주에 대해서는 저도 의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저런 사랑이, 가능할까?”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의 범주는 어디까지일까요? 영혼? 지금의 자아? 육체? 저는 항상 이 범주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해왔었습니다. 제 기준으론 지금 제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자아를 가지고 있으며, 나와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나와 함께했던 영혼으로 존재하며, 내가 사랑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간단하게 보이는 ‘사랑한다’라는 말에도 수많은 범주가 포함되어있는 거죠.

그 안에는 ‘육체’가 분명히 포함됩니다. 외모를 보고 만난 게 아니라고 할지라도, 연인의 외모가 출중하지 않을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란 감정을 느껴본 분이라면 흔히 ‘콩깍지’라고 불리는, 외모가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연인임에도 사랑스럽고 멋있게만 보이는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을 텐데요. 저는 이 과정이 그 육체마저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육체를 먼저 사랑하고 정신을 사랑하게 되었든, 혹은 정신을 사랑하다 육체마저도 사랑하게 되었든.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우리들의 사랑엔 ‘육체’가 배제될 수 없다는 것이죠. 

저는 이것이, 결국 인간은 ‘실체’의 현혹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라고 생각하는데요. 그 사람의 ‘인성’이 좋아서 만났더라도 결국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육체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은 그 ‘육체’일 뿐이죠. 그 사람의 인성, 마음도 느껴지기는 하나 실체가 없습니다. 다만 느껴질 뿐, 손에 쥘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당장에 바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육체에 현혹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애초에 정신만을 사랑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채팅 등으로 사랑을 키워온 경우로 납득하자면) 그 사람의 정신만을 사랑해 처음 시작할지라도, 끝내는 육체마저도 ‘사랑’의 범주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뷰티인사이드는 상당히 생각할 거리가 많았는데요. ‘김우진’의 육체는 실재하지만 실체가 없습니다. 이수가 사랑하는 대상은 ‘김우진’이지만, ‘김우진’은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죠. ‘오늘의 김우진’은 당장 이수의 눈앞에 존재하고 만질 수 있지만, ‘김우진’이란 존재의 모습을 떠올려보려고 하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정신’을 ‘육체’로 형상화 시킬 수 있다면, 이수에게는 이것이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그 존재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정신은 ‘김우진’이라고 할 지라도 그 ‘육체’는 오늘 처음 보는 이의 것이며, 전혀 익숙지도 않습니다. 그 육체를 ‘사랑하는 이의 것이다’하고 조금 사랑하려고 하는 찰나에, 또 다시 김우진의 육체는 바뀌겠죠. 그런데 그 낯선 육체가 살갗을 맞닿아 온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이는 이수의 독백 대사에서 여실하게 드러납니다. 이수가 아무리 김우진의 ‘정신’을  사랑하더라도 사랑할 ‘육체’, ‘실체’가 없는 김우진은 매 순간 낯설만큼. 실체적인 육체의 부재는, 이수가 김우진을 온전하게는 사랑할 수 없게끔 만들었습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이를 사랑하다보니 이수의 사랑 조차도 실체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결국 이수가 모든 것을 극복하고 우진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나지만, 글쎄. 영화가 끝난 후 한참동안이나 생각을 해봐도 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외관이 못난 육체도, 어떤 성별을 가진 육체도.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육체 자체가 명확하게 존재치 않는다면,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요? 유령과 사랑하는 이의 이야기라도 그 유령이 나타나는 ‘모습’이 있습니다. 느껴지진 않더라도 일정하게 ‘보이는’ 모습은 있겠죠. 아마 그를 사랑하는 이는 자연스레 그 ‘모습’을 그의 육체로써 받아들이고, 머릿속에서 ‘그 사람’으로서 그 모습을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김우진을 사랑하는 이수는, 김우진을 그리워하며 어떤 모습을 떠올려야할까요? 떠올릴 존재조차 알 수 없는 사랑이, 과연 온전할 수 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 글을 읽고 계실 분들의 판단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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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에게 물었어.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같은 걸까?
 날마다 같은 모습을 하고 날마다 다른 마음으로 흔들렸던…
어쩌면 매일 다른 사람이었던 건 네가 아니라 나였던 게 아닐까?”


 앞서 제가 저만의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 말할 때 ‘현재’라는 강조해서 사용했는데요. 사랑에 관해서, 사람에 관해서는 ‘현재’라는 가치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제의 저와 오늘의 저는 다릅니다. 불과 10분 전의 저와 지금의 저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저와 누군가 이 글을 읽고있을 때의 저도 분명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바뀝니다. 똑같은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매 순간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매 순간순간 다른 자신이 사랑하는, 혹은 매 순간순간마다 다른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런 존재. 그것이 ‘사랑’아닐까요?  앞서 나름대로 외모니, 성별이니, 육체의 실체니 하면서 거창하게 설명해 보았지만, 결국 이 말도 안되는 상상력으로 출발한 영화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키워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우진처럼 매일매일 육체가 바뀌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매순간마다 ‘다른 사람’이 되는 누군가를 ‘그 사람’이라서 사랑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영화 포스터의 문장처럼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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