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든 것이 미끼고 현혹될 것이라, 영화 < 곡성 > [문화 전반]

글 입력 2016.07.03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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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곡성포스터.jpg
  

  영화 <곡성>을 봤습니다. 두 번이나! 그 말을 하니 누가 저한테 아니 왜 그 영화를 두번 보냐고 하더군요. 그래도 두 번 보고 싶었습니다. 처음엔 너무 정신없이 찜찜하고 궁금증만 가득해서 한 번 더 보면 좀 더 보일까 싶어서요. 결론적으로는 큰 틀에서는 그다지 바뀐 것이 없습니다. 어째서 이것이 15세 관람가인가에 대한 생각은 떠나지가 않습니다(!) 그만큼 깜짝깜짝 놀라고 잔인한게 많았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메세지는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전라남도 곡성에는 갑자기 흉흉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소문에 의하면 얼마전에 온 일본인 때문이라고 하죠. 피칠갑을 한 사건 현장에 잔인한 시체들이 즐비합니다. 검사결과로는 먹으면 반쯤 미치는 독버섯때문이라던데 그것도 이유라기엔 찜찜합니다. 덩치에 비해 빈틈많고 가시내 같은 경찰 종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소문에, 그리고 그 흉흉한 사건의 N번째 피해자가 됩니다. 


효진이.jpg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입니다. 딸 효진이가 그 일본인에게 몹쓸 짓을 당하고 나서 효진이는 변하기 시작합니다. 아빠한테 바득바득 대들면서 문제의 '뭣이 중한디!'라며 욕을 하기도 하고, 생전 안먹던 생선이며 온 집안 밥이며 반찬이며 걸신들린 것 마냥 먹어댑니다. 온 몸에 이상한 두드러기가 나더니 옆집 할머니를 찌르기까지 합니다. 이런 효진이를 위해 종구는 일본인에게 가서 난리를 피우기도 하고, 굿도 해보고, 성당도 찾아가보고, 마지막엔 다 버리고 친구들과 혼자 덤비기도 합니다. 혼자 모든 것을 걸어 싸우고 나서는 이제는 고비를 넘겼다 싶기도 했습니다. 효진이가 멀쩡하게 돌아온 것 같았죠. 하지만 그건 태풍의 눈 같은 순간이었을 뿐입니다. 그에게 무슨 선택을 해야 효진이와 가족 모두를 살릴 수 있을지 선택을 다시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효진이도, 가족 모두를 빼앗아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내린 선택을 후회하면서 중얼거립니다. "효진아 아빠 경찰인거 알제, 아빠가 다 해결할게" 이렇게 안타까운 이야기가 또 있을까요. 보고도, 듣고도, 직접 느끼고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순간에서 무기력함이 넘실넘실 퍼집니다.

  영화의 포스터에서 반복적으로 '미끼를 물었다', '절대 현혹되지 마라'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고 영화 전반에서도 미끼와 현혹과 연결시킬 수 있는 부분이 많아 이 점에 초점을 맞춰보려 합니다. 영화의 대표적인 등장인물은 종구(효진아빠), 양이삼(성당 부제), 무명(이상한 동네여자), 일광(용한 무당), 외지인(일본사람) 다섯사람으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일광, 외지인은 종구와 양이삼 곡성과 관련된 모든 인물에게 알 수 없는 상황과 딜레마, 즉 미끼를 던지는 존재입니다. 무명은 이들을 방해할 수는 있지만 없앨 수는 없습니다. 종구와 양이삼은 그 미끼를 물어서 딜레마에 빠져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인물입니다.

  종구의 미끼는 역시 효진이입니다. 하지만 그는 둔하고 기지배같다는 인상에 비해 생각보다 강하고 '촉'이 좋은 편이라 미끼를 물긴 했지만 쉽게 당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모두가 루머라면서 퍼뜨리던 외지인에 대한 소문을 믿기 시작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요. 그의 꿈에는 계속 빨간 눈을 한 생고기를 뜯어먹는 무서운 일본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는 먼저 그 소문을 이야기해준 사람을 찾아가고 외지인의 집을 찾아나서는 적극적인 면도 보여줍니다. 효진이가 이상해진 후론 효진이에게서 잠깐이라도 떨어져 있는 동안 효진이를 걱정합니다. 그리고 그 잠시동안 정말 효진이는 사고를 쳐놓습니다. 무당 일광이 굿을 하면서 점점 효진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종구가 굿을 멈추었을 때, 많은 관객들은 굿을 멈춘 종구를 욕하곤 했습니다. 저 역시 처음 볼 때는 혹시 저 굿을 끝내지 못해서 외지인을 쓰러뜨릴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아무 근거도 없지만 그의 촉이 결론적으로 옳았습니다. 그 굿을 멈추지 않았더라면 효진이는 생각보다 빨리 목숨을 잃고야 말았을 겁니다. 그 굿이 효진이와 외지인 둘 다를 노렸는지 효진이 한 쪽만을 노렸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는 효진이가 걸린 미끼를 뭐라 이유를 댈 수 없는 촉으로 하나하나 해결해가는 듯하지만,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촉이 힘을 다한 듯합니다.  


외지인과만남.jpg
 

 먼저 그는 효진이가 처음 외지인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나서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버립니다. 그의 소중한 딸 효진이를 먼저 건드렸기에 그는 외지인의 개를 죽이고, 외지인을 죽이려고 했고, 외지인이 만들어낸 박춘배를 죽이고 맙니다. 물론 그에게 뭐라 탓할 이는 아무도 없겠지만 그가 효진이를 생각하며 뿜어낸 분노 때문에 외지인을 제대로 건드려서 스스로 미끼가 된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무명이 아마 이야기하고자 했던 '네 딸의 애비가 죄를 졌다'는 말은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인 행동일 것이구요. 다시 한번 그는 이성을 잃었습니다. 멀쩡해진 줄 알았던 효진이가 집에 나갔습니다. 종구는 모르지만 다시 예전처럼 걸신들린 듯 밥을 다 먹어치우는 등 이상한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입니다. 종구에게는 효진이와 가족을 구할 서로 다른 선택지가 펼쳐지는데 그 사이에서 그는 무척이나 갈팡질팡합니다. 일광은 외지인이 아니라 무명이 나쁜 귀신이라며 무명의 말을 믿지 말고 당장 집에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무명은 일광은 외지인과 한 패라면서 그의 말을 믿지 말고 닭이 세 번 울 때까지만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덫을 놓아두었다면서요.


가지마.jpg
 

  종구는 무명의 말을 듣지 않고 세 번 울기 전에 집에 돌아가고 맙니다. 결정적으로 경찰로서 그의 시선이 무명의 소지품이 모두 현재까지의 희생자들의 것이고 딸 효진이의 머리핀도 갖고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를 가지 말라고 붙잡는 무명의 손이 너무나 검고 혈색이 없는 것도 한 몫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종구는 일광이 종구에게 '무명에 대한 의심'이라는 마지막 미끼를 물었기 때문입니다. 경찰의 매서운 눈썰미가 무명에게는 통하긴 했지만 나쁜 의미로만 그렇습니다. 정작 무명이 걸어놓았을 덫이 무엇인지 그는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영화 처음 시작에 그는 그 해골모양의 금어초로 만들어놓은 덫을 직접 보았는데도 말입니다. 그의 눈썰미는 그는 일광의 속옷이 그가 꿈에서 보았던 빨간 눈의 일본인과 같은 일본식 속옷이라는 것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일광2.jpg
 

   생각해보면 이상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왜 일광이 굿을 했을 때 효진이는 죽을 듯이 괴로워했을까요? 왜 그는 말도 안했는데 외지인은 사람의 형상을 했지만 악질 사령이며 그 놈이 미끼를 던지는 데는 이유가 없다면서 모든 걸 알고 있는 듯이 얘기할까요? 그는 외지인에 대항할 수 있는 전문가일까요 아니면 외지인과 정말 한 패일까요? 그 순간 그의 속옷이 먼저 떠올랐다면, 아니 빨간 눈의 외지인만 먼저 떠올랐더라면 그는 무명이 아무리 찜찜했더라도 닭이 세번째 울 때까지 기다렸을 것입니다. 미끼를 삼켜물었다던 일광이 종구에게 꽤나 매력적인 마지막 미끼를 던진게 성공한 셈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일광은 종구의 사진을 찍을 때 유독 시간을 들여 가만히 응시합니다. 그에겐 참 잡힐 듯 말 듯 애간장을 태워서 더 의미있는 사진일지도 모르죠. 종구의 잃어버렸던 촉은 아마 집 문턱을 넘어오면서부터 다시 돌아왔을 겁니다. 그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이미 예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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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양이삼은 영화에서 그리 비중있는 역할은 아니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그가 가진 의미가 커집니다. 양이삼에게 던져진 미끼는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이었던 듯 합니다. 그는 아직 신부가 아닌 부제입니다. 종구와 함께 외지인의 집에 들려 이 모든 기이한 광경을 함께 하면서 그에게도 궁금증이 생기는 듯합니다. 외지인이 왜 이곳에 왔는지, 누구인지 묻는 질문에 말해도 믿지 못할 것이라는 그 문장이 시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 그는 종구와 함께 피투성이 외지인을 도로 밖으로 굴러떨어뜨려놓고도 다시 외지인의 집 근처에 들려 살아있는 그의 모습을 확인합니다. 외지인이 말했듯이 그는 그가 악마라고 마음으로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두 눈으로, 두 귀로 그의 존재를 정확히 알고 싶어합니다.  이미 답을 아는데도 미끼를 물고 제 발로 찾아왔으니 현혹되어버린 셈입니다.


  영화의 처음 누가복음의 구절과 똑같은 말을 외지인인 악마는 희롱하듯이 따라합니다. 손바닥에 뚫린 구멍까지도 똑같이요. 보고 만져보아서 뭔가를 알려고 했던 이삼을 풍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는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누가복음 24장 37절 - 39절

 

  너의 그 대단한 예수님은 여기에 없다는 걸 비웃듯이, 아니면 자신이 그 만큼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이. 그래서 이제 보고 만지고 나니 만족스러우냐는 듯이요. 올 때는 네 마음이었지만 갈 때는 네 마음이 아니란다, 아니 너가 이 곳에 오게 된 것도 이미 정해진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점점 몸에 힘이 빠져가면서 그 역시 후회했겠죠. 자신이 미끼를 물었고 현혹되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요. 종구에게나 이삼에게나, 여태까지의 피해자 누구에게나 이렇듯 각자 빠져나갈 수 없는 미끼는 분명 있었던 모양입니다.

 
금어초.jpg
 

   사실 외지인과 일광, 무명에 관해서는 의미에 대한 해석이 무척 다양합니다. 외지인과 일광이 서로 다른 악마라는 설도 있고 협력자라는 설 등이 존재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한 패라는 무명의 말이 맞다고 봅니다. 같이 사진을 찍는 방식으로 미끼를 물기 전의 피해자의 행복한 모습과 핏기 없이 절망에 빠진 모습을 담는 것이 비슷하죠. 하지만 둘의 결정적 차이는 생명력과 힘에 있습니다. 외지인이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는 놈이라고 무명이 말하는데 비해 무명의 존재만으로도 속을 게우고 피를 흘리는 일광은 외지인의 협력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하위의 존재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외지인이 거의 죽은 한 희생자 박춘배를 다시 살려내려다가 중도에 실패했던 방법처럼 그가 무명을 그렇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사람이라면 영리하니 악마에게 협조하는 것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수도 있구요. 무명은 이렇게 많은 곡성 사람들이 하나둘 잔인하게 죽어가고 이를 너무나 안타까워하는 마을의 수호신같은 존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외지인을 쫓아서 피투성이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서도 먼저 그가 나쁜 일을 벌이는 것을 예방할 수는 없고 매번 실패하는 금어초(시들면 해골모양 꽃을 한 꽃) 결계를 쓰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jpg
 

      외지인이 굳이 일본인인 것과 관련해 일광과 외지인을 일제강점기과 연관지어 설명하는 경우는 흥미로워서 소개해보려 합니다. 게다가 원래 영화의 결말은 곡성의 모두가 죽고 외지인의 여권이 1930년대 일제강점기 사람이라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했으니 설득력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일광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이면서도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앞잡이 역할을 한 사람에 가깝겠죠. 그는 종구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듯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엔 외지인과 같은 편에 있다는 점에서 진실과 거짓을 넘나들고 있습니다. 곡성은 한반도를, 무명은 그렇다면 '네 딸을 살리고자 하는 여자'라는 면에서 일제강점기에 많은 상처를 받은 우리나라의 여성 혹은 모든 사람을 대변하는 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나 우리의 전통 신앙과 관련해서도, 언급되지 않은 어떤 관점으로도 이 영화는 해석이 가능하기에 그 무엇도 확정짓지는 않으려 합니다. 그것이 그 영화의 묘미가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영화를 보고 나면 여전히 효진이가 뭣이 중한디!라면서 외치던 그 말과 신부님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며 핀잔을 주던 말이 머리를 맴돕니다. 결국 뭣이 중한지는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말해주진 않습니다. 또 신부님이야 말로 보이지 않은 신을 믿으면서 일본인이 귀신이라는 종구의 말에 직접 보지도 않고 그러냐면서 헛소리로 취급합니다. 다만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세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귀로 들을 수 없는 것, 어떤 방식으로도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란 제 나름의 답은 생겼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면서도 그것을 모순적으로 부정하곤 한다는 것도요.

  꼭 곡성이 작은 동네가 아니라, 이 세상, 혹은 우리 마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다른 입장이 이것이 최선이다, 정답이라고 말하지만 정말 그것이 미끼인지 혹은 해답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심이나 확인하려는 마음이 우리를 잘못된 곳으로 이끄는 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매번 매순간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순간 미끼를 물고 현혹될 것입니다. 다행인 건, 영화와 다르게 우리가 문 미끼와 현혹된 순간이 바로 곡성(哭聲)으로 반드시 이어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앗, 그것도 하나의 미끼인걸까요.


- 이 리뷰는 문화의 소통을 강조하는 ART insight와 함께 합니다.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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