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직 예술하는 세상만이 지속 가능하다 [예술철학]

오직 사랑하는 이들 만이 살아 남듯(Jim Jarmusch, 2013), 오직 예술하는 세상 만이 지속 가능하다.
글 입력 2016.06.24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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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어떤 위치에 있나


 영화를 보거나 문학을 읽을 때, 제목만으로 마음을 설레게끔 하는 작품들이 있다. 이제는 미국 인디 영화의 고전이 되어버린 '천국보다 낯선'으로 유명한 짐 자무쉬(Jim Jarmusch)가 감독을 맡은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 남는다'(Only Lovers Left Alive, 2013)가 개인적으로 그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제목을 다시 한 번 곱씹어본다. 물론,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지만, 사랑하기만 한다면 살아남기에 충분할까. 영화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도 충분히 황홀할테지만, 이번에는 살아 남으려면 사랑 이외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집중하고자 한다.


오직 사랑하는.PNG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움직인 흔적을 역사(歷史)라고 할 때, 그것에서 무엇을 가장 최고의 가치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과학 기술, 정치 체제, 이념, 의학 등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들 중 예술은 번번이 논의의 대상에서 소외되어 있지 않은가하는 의문이 든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사용하는 소위 딴따라는 '인류'라거나 '역사'등의 거대한 담론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일까. 예술에 관한 담론들은 그저 배부른 사람들의 사치품이거나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도피로 생각하고 넘어가면 되는 건가.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어쩐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심미주의 선언


 얼마 전 충북대학교 문광훈 교수가 쓴 ‘심미주의 선언’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에 따르면 “심미적인것은 대상을 사회과학처럼 직접 설명하거나 진술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심미적 경험은, 그것이 삶의 조건을 되돌아보며 성찰케 한다는 점에서 삶을 쇄신시킨다.”고역설하고, 이어서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그것은 깊은 의미에서정치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예술이 지닌 심미적, 성찰적 속성이 ‘인류’의‘역사’에서 ‘정치’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그의 논리가 인상적이다.
 

심미주의 선언.PNG
 

 근래의 한국 사회에는 이러한 예술이 담당하는 정치적 의미가 더욱 절실한 듯 보인다. 인종, 계급, 젠더, 생태 등 각종 사회 현안에서 부딪히는 갈등과 그 과정에서 표출되는 혐오의 수준이 위태롭다. 대화와 소통, 타협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기에, 사회적으로 표출되는 폭력성과 증오의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달궈지는 듯 하다. 이념, 정치, 정책 등의 시도들만으로 쉬이 진정될 것 같지 않다. 이러한 때에 현실을 환기하고 인간을 되돌아보게 했던 예술들이 얼마나 빛이 났던가.

 단적인 예로,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그림으로 표현한 피카소의 '게르니카', 나치 독일의 역사를 복기했던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 한국 전쟁의 아픔을 담아낸 최인훈의 '광장' 등 회화, 영화, 문학, 음악을 막론하고 시대적 아픔과 조우하며 인간성의 최후의 보루로서 작용한 예술을 열거하기가 벅차다. 뿐만 아니라, 인간, 사랑 혹은 아름다움(美) 자체를 노래하고 표현했던 예술들도 인간적인 것, 아름다운 것에 대해 사유하고 감각하게끔 했다는 점에서 사회 참여적 예술 못지 않은 가치를 지닌다.


게르니카.jpg
 
광장.jpg
 
쉰들러 리스트.jpg
 




오직 예술하는 세상만이 지속 가능하다


 시중에 나온 미학 관련 서적들을 훑어보면, 수많은 철학자, 미학자들이 미와 예술을 연구하면서 그것이 내포하는 감성의 영역에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난해하고도 복잡한 이론적 논의를 차치하고, 예술이 감성의 영역에서 서로의 정감을 주고 받으려는 표현이라는 점은 합의할 수 있겠다. 그리고 예술을 창작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정감을 주고 받는 심미적 경험은 자연스레 자아성찰을 불러 일으킨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예술이 현실을 변혁하는 가장 인간적인 방법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인 것이다.

 올해 초에 개봉했던 영화 '동주'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영화에서 시인인 윤동주와 혁명가인 송몽규가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면서 문예지를 발간한다. 잡지에 실을 시와 산문을 고르는 과정에서 둘의 의견이 충돌한다. 대중을 감상주의자로 나약하게 만드는 시는 가급적 싣지 말자는 몽규에게 동주가 일갈한다.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진실을 드러낼 때 문학은 온전하게 힘을 얻는 거고, 그 힘이 하나하나 모여서 세상을 바꾼다" 문화와 예술을 도구로만 보는 이들에게 시인은 부끄러움을 일러준다.


캡처.PNG
 

 처음에 언급했던 짐 자무쉬의 영화에서는 사랑하는 이들이 살아남는다. 그렇게 오직 사랑하는 이들 만이 살아 남듯, 오직 예술하는 세상만이 지속 가능하다.


[최연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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