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회부적응자를 결정짓는 기준과 편견 사이 [문학]

김혜진의 「어비」
글 입력 2016.06.16 19:1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사회부적응자를 결정짓는 기준과 편견 사이
- 김혜진의 「어비」 -


KakaoTalk_20160616_194827938.jpg
 

 사회부적응자를 결정짓는 그 잣대는 무엇일까? 그 기준을 명확하게 잡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2016 올해의 문제소설』에 실린 김혜진의 「어비」는 사회부적응자를 정의하는 그 기준의 난해함에 대해 독자들로 하여금 생각해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줄거리

 
 ‘나’와 ‘어비’는 물류창고에서 일하면서 만난다. ‘나’가 본 ‘어비’의 모습은 일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잘 하지만, 혼자서만 생활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어비’의 모습에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오기로라도 그를 괴롭히듯 둘러싸고 질문세례를 해봐도 ‘어비’는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어비’를 안쓰럽게 여겨 도와주고자 ‘나’는 종종 ‘어비’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넨다. 그 진심이 통한 것인지 ‘어비’는 그나마 ‘나’에게는 곧잘 말한다. 어느 날 ‘어비’는 그가 속한 팀의 일에 대한 차질이 모두 ‘어비’의 탓이라는 부당한 말을 시작으로 사과를 요구하는 팀장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일을 그만둔다.

 하루는 ‘어비’와 술을 먹고 집에 들어간 날 ‘나’는 지갑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된다. 그 후로 ‘어비’는 연락도 되지 않아 ‘나’는 그를 의심하지만 이내 그를 믿기로 한다. ‘나’도 좀 더 변변한 직장을 갖기 위해 곧 물류창고에서 나온다. ‘나’가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집에서 인터넷 개인 방송을 보고 있던 중 ‘어비’라는 방송이름을 보게 된다. 그 방송에는 ‘어비’가 방송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그가 오죽했으면 이런 방송을 하며 돈을 벌까 하고 한심하게 생각한다. ‘나’는 무역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지만 회사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보인다.

 퇴근하고 다시 찾아 본 ‘어비’의 방송에서 별풍선이 수백개씩 터지는 것을 보고 ‘나’는 화를 주체하지 못한다. 채팅창에 악플을 잔뜩 올리지만 계속 올라오는 채팅 글들에 ‘나’의 글은 ‘어비’에게 까지 닿지 못하고 사라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돈, 권력, 성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어비’는 그것들에 지배되지 않고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물이다. 소설의 초반부를 읽을 때는 ‘어비’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어비’를 사회부적응자라고 생각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왜 저렇게까지 피할까 싶을 정도로 말도 안하고 거리를 두는 모습이 사람들과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혼자 동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과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과연 사회부적응자라고 결정지을 수 있는 분명한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어비’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는 말을 섞지 않지만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나’에게는 말을 곧잘 하고, 팀장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는 당당하게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소신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어비’는 자신의 의지로 말을 할 수도, 안할 수도 있는 사람이고, 단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 모두와 소통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비」에 이런 장면이 하나 나온다. ‘어비’가 물류창고에서 키우는 강아지와 함께 있을 때 ‘나’는 그 곁으로 가서 집 속에 있는 강아지를 부르지만 나오지 않자 발을 억기로 끌어다 자기 앞에 놓는다. 강아지가 스스로 개집에서 나오고, 나가지 않고를 결정할 수 있는 의지를 갖고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나’가 강아지를 억지로 끌어당기는 것은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지 강아지 입장에서는 귀찮고 짜증나는 일일 것이다. 이와 같이 ‘어비’가 스스로 그들과 소통할지 안할지 결정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억지로 그가 말을 하게끔 하는 것은 괴롭힘에 지나지 않는다.

 ‘어비’는 자기가 맡은 일도 성실히 잘 할 뿐만 아니라 조용히 쓰레기를 갖다 버린다던지 물류창고에서 키우는 강아지 밥그릇을 씻는다던지 자기가 맡은 일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어비’의 모습을 보면 그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진다.

 반면에 ‘나’는 처음에는 사회부적응자라고 낙인찍힌 ‘어비’를 도와주는 인물로 그려지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사회부적응자가 되어가는 듯하다. ‘나’는 ‘어비’와 다르게 자본주의 사회에 허덕이고 사회적 편견을 가진 인물이다. ‘나’는 무역회사에 들어가서 ‘어비’와 대조적으로 일을 스스로 찾아서 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느낀다. 더불어 상사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생활을 반복하면서 점점 자아가 약해지고 자신이 사회에 부적응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한때 자기가 사회 부적응자라고 생각했던 ‘어비’가 인터넷 개인 방송을 통해 돈을 잘 버는 모습을 보니 ‘나’는 그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질투가 생겼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지갑이 없어진 것도 ‘어비’의 탓으로 돌리게 되면서 ‘나’는 그에게 화를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준과잣대.jpg
 

 결국 평범한 사람도 점점 사회부적응자로 만드는 것은 사회이다. 사회의 편견, 그 획일화된 기준이 평범한 사람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틀린’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는 ‘다름’을 이해하고 ‘차이’를 인정하라는 현대사회의 모습과 모순되는 현상이다.

 우리는 보통 어른들이 아이들이 더러운 것을 만지거나 어떤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할 때 ‘어비’라는 감탄사를 쓴다. 인물의 이름과 더불어 소설의 제목으로 쓰인 ‘어비’는 사람을 사회적 편견으로만 바라보고 획일화 된 기준으로만 평가하여 평범한 사람도 더럽다고 잘못 생각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담은 단어인 것 같다. 내가 사회부적응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는지, 사회에 적응을 잘하는 것만 같았던 내가 사실은 사회부적응자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정이지.jpg
 

[정이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