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노노케 히메-1 [시각예술]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작
글 입력 2016.05.2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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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명작 「모노노케 히메」 를 보고 리뷰를 하고자 한다. 위 영화는 어렸을 때 재밌게 봤던 영화이기도 하고 수차례 재탕을 통해 숨은 의미를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어린 시절 처음 접한 일본적인 느낌은 뇌리에서 쉽게 잊혀지지 않고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냈다. 어린이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제목 「모노노케 히메」에서 ‘모노노케’는 일본의 고전이나 민간신앙에서, 사람에게 씌어 병에 걸리게 하거나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귀신을 나타내고 ‘히메’는 공주를 의미한다. 모노노케 히메는 극중 인간들에게 버림받고 숲에서 자란 소녀 ‘산’을 지칭하는 말이다. 질병으로 일컬어지는 모노노케를 감독은 자연의 수호신으로 상징화시킨다.

 
영화를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키워드는 인간과 자연(숲)의 갈등과 공존 모색이다. 영화 내에서도 환경 코드가 주를 이룬다. 이야기는 주인공 아시타카가 인간의 이기로 재앙신이 된 나고신(맷퇘지 신)의 저주를 받고, 이를 해결하고자 마을을 나서면서 시작된다. 영화는 도입부부터 강력히 자연의 분노를 표출한다. 총을 맞고 재앙신이 된 나고신은 “어리석은 인간들아 너희는 자연의 증오와 한을 알아야한다.”고 말하면서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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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떠난 그는 타타라바(철을 생산하는 마을)에서 인간의 번영을 위해 희생되는 자연을 보게 되고 숲에 사는 동물신들과 인간의 갈등을 목격한다. 그 중 흥미로운 것은 모노노케 히메라고 불리는 ‘산’의 존재이다. 산은 인간이지만 들개의 손에 자라 인간들을 증오한다. 산을 포함해 숲을 지키는 들개 일족은 타타라바 마을의 우두머리인 에보시와 갈등을 겪고 있다. 아시타카는 작중 내내 자연과 인간으로 대표되는 그 둘 사이를 오고가며 공존을 추구한다. 대표되는 장면으로는 타타라바 마을을 공격한 산과 인간인 에보시의 싸움을 멈추게 한 것이다.아사타카는 왼손으로는 산을 막고 오른손으로는 에보시를 막으며 마을 사람들에게 소리친다. “보시오! 내속의 원한과 증오의 모습입니다. 육신을 썩게하고 죽음을 부르는 저주라구요. 더 이상 증오에 휩쓸리지 마시오”
 

에보시는 철을 만들기 위해 숲을 베는 등 대자연의 적으로 그려지지만, 한편으로는 마을의 문둥병 환자들을 치료해주고 당대 억압된 여성들을 위한 공동체를 운영한다. 당시는 무로마치 막부를 배경으로 여성의 역할이 제한된 사회이지만 에보시는 철의 생산으로 남성들보다 강하며 여성들이 핵심재화인 철을 생산하게 한다. 때문에 타타라마 마을은 남성보다 여성이 기득권이며, 다른 공동체에서는 약자일 문둥병 환자와 여성들이 총을 사용한다. 이는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여성주의 의도를 담고 있다. 감독은 기존 작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붉은 돼지>에서 볼 수 있듯 다른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여성 인물이 맡는 역할과는 반대로, 그의 영화에서는 기억에 남을 만큼 강한 여성 주인공이 등장한다.

절대자 ‘시시신’ 또한 여타 동물신들이 섬기는 신성하고 무결한 존재로 묘사되지만 그는 삶과 죽음 양면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낮에는 사슴의 형태인 시시신으로 존재하고 밤에는 거대한 데다라신으로 존재하는 것도 그의 양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즉 뚜렷한 선과 악의 구분이 없다. 에보시는 인간이 문명을 이루고 살아가는데 자연의 영역을 침범할 수밖에 없는 필요악을 대변하고 시시신은 삶과 죽음만을 나타낼 뿐 절대적 선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시시신은 자연의 절대자로 동물들의 숭배를 받지만 그들의 편에 서지 않는다. 단지 지켜볼 뿐이다. 생명이 필요한 자에게는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생명을 앗아간다. 그는 에보시와 산의 싸움을 제지시키다 총을 맞은 아시타카에게는 생명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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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이 자연을 경배의 대상에서 점점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도 엿볼 수 있다. 극중에 옷코토누시, 모로, 시시신, 성성이들 등 산짐승을 신으로 섬기는 애니미즘이 지배적인 사상이다. 철기를 사용하는 에보시는 그런 ‘신’들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철기를 사용하면서 더 이상 자연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게 된다. 인간들은 동물과 동등하거나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는 후반부에 시시신이 에보시의 총에 맞아 목이 잘렸을 때 잘 드러난다. 절대자인 시시신 마저 에보시의 총에 머리가 날아간다. 산짐승들은 신에서 가축이 된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인간이 비교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이래로 인간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끝없는 탐욕과 욕망은 관계의 파멸과 모두의 종말을 의미한다.
 
숲을 정복하고 시시신의 죽이려 했던 사냥꾼들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나타낸다. 에보시는 사냥꾼들과 협력해 시시신을 죽이는데 성공한다. 그 후 시시신도 재앙신화 되고 숲뿐 아니라 인간의 세상까지 종말을 맞이한다. 어디에도 생명을 찾아볼 수 없으며 사람들은 두려움에 떤다. 산을 깍고 나무를 베어 건물을 세우는 등 자연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여도 큰 자연재해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과 흡사하다. 결국 사냥꾼들이 가져간 시시신의 목을 아시타카와 산이 돌려주면서 새로운 전개를 맞이한다. 아시타카와 산이 두 손을 모아 재앙신의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고 시시신의 머리를 돌려주는 장면에서 새로운 희망이 보인다. 시시신이 머리를 돌려받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숲은 새롭게 다시 살아난다. 원초적이게 된다. 되살아난 숲을 보며 아시타카는 산에게 “ 산은 숲에서 나는 타타라바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자” 고 말한다. 숲의 깊숙한 곳에 숲이 풍요롭다는 증거인 코다마가 등장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아시타카와 산의 대화를 통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방법을 찾았음을 의미한다. 서로 각자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각자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함께 사는 것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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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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