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몸'에 관한 가장 시적인 산문집, 김경주의 < 밀어 > [문학]

글 입력 2016.05.2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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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 몸이라는 단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 단어 자체도 또 하나의 ‘육체’처럼 느껴진다. ‘ㅁ’이라는 작은 세계, 머리. ‘ㅗ’ 모양으로 번지는 흉골과 늑골. 그리고 다시 ‘ㅁ’으로 다물리는 하반신의 공간. 은밀한 긴장감으로 맞물리는 신비한 레고의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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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전소연


  애플힙, 복근, 넓은 어깨, S라인 등 현대 사회에서 몸은 깊은 응시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시각적 소비 대상, 탐닉의 대상에 불과하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누군가의 몸매를 언급할 때, 혹은 자기 자신의 몸을 평가하듯 들여다 볼 때 어쩌면 우리는 더 숭고하고 진지한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몸의 구석구석에 대해서 또 다른 사람을 대하듯, 또 다른 세계에 노크하듯, 누드 크로키를 그리듯, 나부상(裸婦像)을 감상하듯, 시를 쓰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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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몸에 관한 가장 몽상적인, 시적이고도 너무나 시적인 아주 놀라운 산문집이 있다. 2012년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김경주의 「밀어」. 뺨, 몽정기, 잇몸, 날개뼈, 보조개, 목젖, 가슴골, 갈비뼈, 고막, 솜털, 항문, 콧망울 등 우리 신체 각 부위와 현상을 기막힌 언어적 상상력으로 짚어나가는 책이다. 일반적인 산문집을 상상하면서 이 책을 펼쳤다간 한 줄도 이해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것이다. 미학 서적 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 하고, 에세이 같기도 하고, 신체 설명서 같기도 한 이 전위적이고 철학적이고 해체적인 책은 우리 몸, 피부 조직 아래 이름 모를 근육과 작은 뼈까지도 살아있는 목소리 혹은 흐릿한 정령(精靈) 같은 존재로 느끼도록 이끈다. 김경주는 아래와 같은 마술적인 언어를 통해 아무도 가 닿지 못한 육체의 골짜기를 여행하고 채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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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전소연 


“몽정은 타인의 몸과 나누는 성교가 아니다. 자신의 육체와 벌이는 성교다. 산달을 채우는 산모가 자신의 육체와 밀애를 나누며 아이와 함께 있듯이 (산통은 자신의 육체와 나누는 가장 극단적인 성교를 상징한다.) 몽정은 자신의 몸을 그리워하며 몸을 지나간다. 몸에 잔설을 남긴다. 불타버린 절의 재처럼, 희고 결별한 듯한 잔설을 몸에 남긴다. 녹는 뿔에 올라탄 기녀처럼, 산중을 헤매는 선승의 입술 위에 내려앉은 흰 나비처럼. < p.39 몽정기 >"
“눈망울은 몸 안의 천문대이다. 눈망울은 몸이 운행하는 천문대의 비밀이다. < p.63 눈망울 >”
“우리는 연주자의 연주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의 손가락들이 피아노라는 사회로 들어가고 있는 하나의 공간을 듣는 것이다. 그것은 명백히 일종의 현기증이다. 청중들은 눈을 감은 채 손가락이라는 공간들이 피아노를 드나드는 것을 보면서 다른 사회를 만나기 때문이다. 음악이라고 부르는 그 사회에 초청받기 위해서는 이 숨 막힐 듯한 경험을 해 봐야 한다. 음악회에서 눈은 우리에게 잠시 소멸되는 신체의 기관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눈을 감고 연주를 하는 연주자와 눈을 감고 연주를 듣는 청중 사이에는 불가해한 침묵만이 흐른다. 그것은 음향으로 이루어진 침묵이다. < p75. 손가락 >"
“나는 인간의 혀를 마주할 때마다 만일 저 ‘혀’가 태내에서 우리의 인체가 형성되는 과정 중 ‘혀’가 되지 않았다면 어떤 내장이 되었을까 궁금하다. (중략) 인간의 혀는 운이 좋아 밖으로 나온 내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입안에 존재하기 때문에 완전히 몸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 내장이기도 하다. < p.142 혀 >”


  확실히 보통의 산문집으로 받아들이기엔 어렵다. 특유의 깊은 사유로 몸이 지닌 내밀한 욕망과 세계, 숨겨진 언어들을 풀어내는 과정에서 은유와 상징이 너무나도 복잡하게 엉켜 있기 때문에 시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심하게 난해하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시인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엄청난 서적들을 탐독했다고 한다. (이전에 필자가 소개한 적 있는 몽상의 철학자, 바슐라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사용된 언어학, 문학, 철학, 의학, 민속학, 생물학적 용어들을 설명하는 주석들만 봐도 그가 얼마나 만고(萬苦)의 사색과 탐구 끝에 작품을 완성해 내놓았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린다. 김경주 시인의 작품을 애독하는 자거나 해석이 어려운 텍스트라 해도 그 자체를 좋아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독자가 있는가 하면, 공감도 힘들고 이해도 힘들어 멘탈붕괴가 오는 책이라 그냥 어려운 글로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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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전소연


  무엇이 좋은 글인지 결정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모든 문화예술적 콘텐츠는 다가섬과 해석이 필요하다. 방송에서나 볼 수 있는 연예인들의 사소한 제스처와 발언들로는 끊임없이 담론이 형성되는데 한 인간의 사상과 신념, 발견, 증언, 몽상이 담긴 예술 작품에 대해서는 침묵을 넘어 거절을 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 안타깝다. 예술가들은 모두 자신만의 밀어(密語)를 갖고 있다. 그들은 대게 세상 곳곳에 숨어있는, 있는지도 몰랐던 ‘느낌’들을 발견하고 밑줄을 긋고, 색칠을 하고, 연주한다. 김경주 시인이 발견한 ‘시(詩)적인 육체’처럼 말이다. 그들처럼 똑같이 느끼기는 당연히 어렵겠지만 작품들을 보고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무한한 감각의 세계를 해독하는 과정은 바로, 더듬고 더듬어 내 자신의 원초적인 인간성을 회복해 나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래는 「밀어」의 p. 25에 나오는 한 부분이다. 


“시인의 문명은 고통이 존재하는 육체 속에서만 지어진다. 
언어가 홀로 설 수 있는 육체, 시는 그러한 육체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명이다. 
시인은 육체 속에서 존재하는 흉가를 자신의 라고 여기기도 하고, 
시인은 사랑을 마치고 육체가 추고 있는 춤은 모두 흉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간절기가 되면 눈은 육체의 소문을 내보내기 시작한다고. 
우리 자신의 육체로부터 우리 자신에게서 가장 멀리 있는 육체로, 
어쩌면 우리의 육체가 흉가가 되지 않기 위해 하나의 춤이 필요한지 모른다고, 
우리의 육체가 춤이 되기 위해선 하나의 흉가를 반드시 체험해야 한다고. 
그리하여 해가 짧고 때가 춥고 만물이 스스로를 거두고 감추는 춘분의 저녁으로 가서 
우리들의 진술은 번복된다고. 
하나의 진술 속에 한기가 생기고 뜨거운 수기를 낳고 그곳에 자신의 태궁을 마련한다. 
작은 눈금들이 생기는 명칭은 라고 불러야 하며 
육체보다 이름이 먼저 순환되는 주야를 우리들의 밀어라고 부른다.”





*이미지 출처: 구글 (전소연 사진 작가의 사진들은 < 밀어 >에 수록된 화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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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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