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내겐 너무도 텁텁했던 동치미, 연극 동치미 [공연예술]

글 입력 2016.05.28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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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도
텁텁했던  동치미, 
연극 <동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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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미와 시원함. 뗄 수 없던 것이 분리되는 순간

 ‘동치미’하면 가장 먼저 무슨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저는 ‘시원하다’는 이미지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데요. 단순히 온도에 의한 시원함이 아닌, 막혀있던 것을 훅 뚫어주는 듯한 그 시원함. 체했을 때 찾고 싶은 그런 것. 제게 동치미는 이런 이미지였는데요. 그래서 연극 ‘동치미’를 보면서도, 어느 정도의 ‘시원함’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해야지, 해야지 하고 하지 못했던 여러 생각들, 속에 쌓여왔던 눈물들을 시원하게 내보낼 수 있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제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요. 연극 ‘동치미’는 제겐 전혀 시원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갑갑해졌습니다. 속에 걸려있던 것들이 완벽하게 무언가를 막아 ‘체’한 것처럼 말이죠. 연극 잘 보고 와서, 이런 악평 아닌 악평을 쏟아내니 당황스러우실텐데요. 그래서 지금부터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제가 ‘동치미’를 보고 정신적으로 ‘체할 수’ 밖에 없던 이유를 말입니다.


눈물을 텁텁하게 만들었던 감정의 과잉.

영화 7번방의 선물을 아시나요?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갈리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정말 별로였던 영화였는데요. 그 이유엔 ‘과잉 눈물’이 있었습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란 대사나, 열기구 씬 등. 관객을 울리기 위해 들어간 듯한 연출들은 스스로의 눈물을 불쾌하게 만들었는데요. 더 이상 제가 스스로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의 의도에 의해 놀아나고 있단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연극 동치미를 보면서도 이러한 과잉 눈물, 감성의 과잉을 느꼈는데요. 자잘한 감성의 과잉은 연극 ‘동치미’의 특성 상 어쩔수 없지만, 그것이 불쾌하게까지 느껴졌던 것은 크게 두 장면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큰아들과 둘째 딸과의 회상씬입니다. 이 씬에서는 같은 대사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또 반복해 감정을 끌어올리려는 시도가 있었는데요. ‘반복’으로 인해 그 장면 자체가 루즈해 진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감수하면서까지 넣었던 연출이 오히려 제 감정을 싸늘하게 식게 만들었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메아리치는 대사는 그 의도가 너무나도 명백하게 보였으며, 그 사이에서 아무런 가치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어머니 정이분의 병원 씬이었습니다. 쓰러져있는 정이분을 보며 가족들이 오열하는 장면이었는데요. 그 서사 상, 그 장면은 어떻게 해도 눈물이 날 수 밖에 없는 장면이었습니다. 굳이 ‘과장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감정이 고조될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는데요. 문제는 그 중간에 딸과 아버지의 대화였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이제 하고 싶은 말 다 해. 쌓아두지 말고, 다 하란 말이야!’ 라는 셋째 딸의 절규로부터 시작 된 대화였습니다. 아버지의 대사마다 ‘또!’, ‘또!’, ‘또!’ 이렇게 비명을 지르듯 추임새를 넣는 딸의 모습은 그 장면에 걸맞지 않을 만큼 감정이 넘치도록 들어갔는데요. 어머니에게 지금껏 하지 못했던 말을 고백하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이해하고 그 한을 풀어주려는 딸의 노력이 ‘아름답게’ 느껴지기 보다는 기괴하게까지 느껴졌었습니다. ‘또!’라고 이유 없이 반복되는 절규는 관객들에게 울라고 강요하는 느낌까지 들어 저를 그 서사에서 완벽하게 분리시켰고, 그렇기에 그 절규가 이해가 안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 동치미 자체가 ‘가족드라마’기에 그 장르의 특성 상 약간의 감정 과잉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그러한 감정의 과잉 자체가 나쁘다고 하는 것 또한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기폭제가 되어서 관객의 감정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경우도 분명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적당할’때 입니다. 조미료는 음식을 더욱 맛있게 만들어주지만 과하면 음식의 본연의 맛을 해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감정의 과잉 또한 과할 시에는 그 연극 본연의 서사를 해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과잉’이 과하게 들어가는 순간, 관객은 필연적으로 ‘작품’ 뒤에 있는 ‘연출’을 느끼게 되고 그 순간 관객은 ‘서사’가 존재하는 작품 속에서 연출이 존재하는 ‘현실’로 끌려나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충분히 훌륭한 서사를 가지고 있는 동치미가 가끔씩 보이는 이러한 과잉 때문에 망쳐지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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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목이 맥혔던 '가부장제'


서사
연극 동치미는 철저하게 가부장제를 따르고 있습니다. 굉장히 여러 차원에서 동치미는 철저하게 ‘가부장제’를 따르고 있었는데요. 일단 기본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입니다. 어머니를 사랑하지만 약간은 무시하며 자주 소리를 지르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놀리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절절매는 어머니의 상은 가부장제 부부의 전형이었는데요. 그 관계성은 아버지의 반말과, 어머니의 존댓말에서도 더욱 잘 드러났습니다. 연극 전체를 지배하는 둘의 관계가 가부장제의 전형이라는 것은, 이 연극 자체의 기본 전제가 가부장제라는 것을 드러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반에 어머니 생일상을 차리는 장면에서도 이러한 ‘가부장제’는 더욱 잘 드러났는데요. 기본적으로 처음 상을 차리려던 사람은 ‘어머니’였습니다. 셋째 딸이 오자 셋째 딸에게 밥을 차리라 요구하구요. 셋째 딸은 그에 ‘언니는!’이라 답하고, 둘째 딸은 오자마자 ‘어머니’는 쉬시라며 본인이 상을 차리겠다고 합니다. 그에 ‘어머니’는 친정에선 일 하는 거 아니라며, 본인이 하시겠다고 하죠. 결론적으로 상을 차리는 것은 ‘셋째 딸’에게 돌아갑니다.
‘상을 차려야 하는’ 후보로 지명 된 사람은 어머니와, 둘째 딸, 셋째 딸 뿐이었습니다. 뻔히 있는 ‘첫째 오빠’는 그 실랑이를 보면서도 ‘당연하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서 본인이 나서겠다고 말을 하거나, 약간 미안해하는 기색조차 없이 ‘당연하게’ 가만히 앉아있습니다. 셋째 딸은 ‘언니는!’이라고 말해도, ‘오빠는!’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은 ‘상을 차리는 일’에서 당연하게도 배제되어있습니다. 가족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깔려있는 부엌일은 여자가, 라는 인식은 철저하게 ‘가부장제’ 가족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딸이 결혼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둘째 딸이 결혼을 할 때, 아버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너는 이제 출가외인이니까, 집은 생각하지 말고 시부모 말 잘 들으며 살어.’ 라고 말합니다. 물론 아버지가 딸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고는 하지만, ‘출가외인’이라는 말은 여성이 결혼한 남성에게 종속된다는 가부장적 사고의 발현입니다. 


연출
 물론, 연극 <동치미>의 서사 자체가 가부장제가 당연시되던 시기의 부모님을 그린 극이기에 서사가 가부장적인 것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굳이 연극에서 가부장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이던 시간대를 재현해내다 보니 서사가 그렇게 흘러간 것이라고 하면 그 정도는 납득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몇몇 대사나 연출만 약간 바꿔도 큰 줄기는 바뀌지 않으면서,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다 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서사 자체가 가부장적인 것은 그렇게라도 납득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더욱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던 것은 연출에 있었습니다. 연극 <동치미>의 주요 장면은 대부분 ‘아버지’에 의해 연출되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사업 자금을 대달라고 부탁할 때, 딸이 결혼 할 때부터 시작해서 아들이 사업자금을 말아먹은 순간이나 결혼한 딸이 시댁 일 때문에 집을 신경 쓰지 못할 때까지 모든 장면에서는 ‘아버지’를 비춥니다. 연극 <동치미>에선 아들딸의 대소사에 도움을 주거나 조언을 해주는 것도, 힘든 순간에 위로를 해 주거나 걱정을 하는 것도 ‘아버지’일 뿐입니다. 분명 그것을 같이 경험하고, 함께 슬퍼했을 ‘어머니’는 그저 벤치에 앉아 눈물이나 찍고 있는 존재일 뿐입니다. ‘부모’의 역할을 하는 장면에서 ‘어머니’를 배경으로 빼고 ‘아버지’를 전경으로 처리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아버지 중심’, 즉 가부장적입니다. 연출의도에서 연극 <동치미>가 전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히 ‘가족애’, 혹은 ‘부모의 사랑’이었지 ‘아버지의 사랑’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죠. 가부장제가 당연시 되던 시대의 가족이라도, 분명 ‘어머니’가 할 수 있던 부모의 역할이 있었을 텐데. 어머니 또한 모든 부모의 역할을 아버지에게 일임하고 눈물만 찍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도 철저하게 ‘아버지’만을 부각시키는 연출은 가부장제가 무너져 가고있는 현시대의 제가 보기에는 무척이나 불편했습니다. 

 누군가는 동치미가 벌써 7년째를 맞이하는 연극이니, 7년 전에는 지금보다 ‘가부장제’에 대한 문제의식 이 아직 많이 제기되지는 않았을 때라 그렇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그 이전의 동치미들을 보지 못해서 확실하게는 말을 못하겠지만, 만약 7년 동안 아무런 연출이 바뀌지 않았다고 해도 문제고 바뀌었는데도 이랬다면 그건 더욱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희곡’, ‘공연예술’이 갖는 장점이 ‘변용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이나, 만화는 이미 창작 된 것에서 변형될 수 없지만 공연예술은 다릅니다. ‘희곡’, 혹은 ‘대본’이라는 원전이 존재하면 그에 대한 ‘연출’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즉, ‘공연예술’은 얼마든지 시대에 맞춰갈 수 있으며, 그렇기에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그 시대에 맞게’ 감상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각 N연이 그 나름의 가치를 갖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극 <동치미>의 연출은 이러한 ‘공연예술’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연극 <동치미>가 ‘시대의 변화’에 대한 고민이 없었거나, 혹은 가부장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어 고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것으로 느껴져서 안타까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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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시원한 <동치미>를 바라며.

  지금까지 연극 <동치미>를 감정의 과잉, 그리고 가부장제에 관련해서 비판해보았는데요. 연극 <동치미>가 나쁜 연극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연극이기에 저런 요소들이 더욱 안타까웠다고 할까요? 어찌되었던 동치미는 ‘가족애’를 말합니다. 바쁜 생활 속 종종 잊게 되는 ‘가족애’. 그 가족애를 상기시킨다는 것만으로도 연극 <동치미>는 충분히 가치가 있습니다. 저만해도, 앞서 말한 것들로 여러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제 어머니와 함께 봤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말이죠. 알 수 없는 가려움으로 피부과를 가보고자 매번 시도만 하지만, 막상 가지는 않고 있는 어머니에게 진지하게 피부과에 함께 가자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제 일상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연극 <동치미>는 가치가 있었습니다. 분명, 가치가 없지 않았습니다. 7년이나 무대에 오르고, 여러 상을 수상할 정도로 어느 정도의 위상도 확보하고 있죠.

 하지만 그런 만큼, 저는 연극 <동치미>가 지금에 만족하기 보다는 더욱 발전해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그런 가치를 가지고 있고, 그런 위상을 가지고 있는 연극이니만큼. 더욱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하는 거죠. 그런 치열한 고민 끝에야, 저와 같은 청년층도 앞서 기대했던 시원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동치미>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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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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