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칼로레아] 이행의 시대

이행이 끝난 이후의 세대에 물려주고픈 예술은 무엇인가
글 입력 2016.05.22 23:53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옛날 이야기를 하나 해 볼까 한다.

옛날에 어느 작은 마을에 부자가 한 명 살았다. 이 부자는 자신이 가진 막대한 재산으로 거대한 메가폰을 하나 샀다. 그 메가폰은 엄청나게 커서 부자가 하는 말을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었다. 부자는 이따금씩 자신이 좋아하는 케이크나 그림 따위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그 날 그 케이크집이나 화랑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가끔 어떤 가게들은 부자에게 선물을 보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기를 넌지시 부탁했고, 부자는 선물이나 그 선물 밑에 있는 봉투가 마음에 들면 그 다음날 메가폰 앞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한번이라도 꺼내주고는 했다.
그 때 마을에 한 청년이 등장했다. 청년은 밀짚모자를 쓰고 손바닥 만한 확성기를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수레를 하나 끌고 다녔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그 작은 확성기를 나눠주었다. 이 확성기는 부자의 메가폰만큼 크고 세지는 않았지만, 반경 500 미터 이내의 사람들에게는 목소리를 또렷이 들려주었다. 이제 사람들은 부자가 들으라고 골라주는 이야기만을 듣지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또 자기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큰 메가폰을 살 수 있는 돈이 없어도 인기가 많은 이야기꾼 집 앞은 사람들과 선물들로 가득 찼다.


메가폰.jpg


이 보잘 것 없는 짧은 이야기는 우리나라 미디어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20세기는 매스미디어의 시대였다. 자본을 가진 이들만이 매스미디어라는 거대한 메가폰을 틀어쥘 수 있었고, 그들은 누가 유명해지고 누가 잊혀 질지를 선택했다. 오로지 선별된 이야기들만이 대중에게 전달됐다. 예술에서 이 ‘선별’은 소위 전문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학위와 지식이 많은 비평가들은 무엇이 좋은 예술인지를 선택했고, 좋은 예술이라 판명 받은 것들만이 메가폰에서 소개를 받고 힘을 얻었다. 이들의 선택은 취향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로 존중받았다. 취향에는 계급이 생겼고, 전문가들과 비슷한 평가 기준을 가진 이들은 ‘안목이 높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예술의 가치는 소수의 평가와 선별로 구성되었다. 
대중은 메가폰을 통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 예술인지를 전달받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이 좋은 예술이라고 선택받은 것들만 전달받았다. 물론 그 메가폰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도 있었지만 그 메가폰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예술은 접할 통로가 없었고, 결과적으로 그 존재조차도 알 수 없었다. 결국 선택받지 못한 이들은 자신의 가치를 대중에게 입증받을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말았다.
그러다 소셜미디어의 시대가 도래했다. 말하자면 모두가 확성기를 가진 시대다. 물론 소리치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은 데다 거대한 메가폰에 밀려 몇 명에게만 목소리를 내는 게 고작이지만, 그 이야기가 인기를 얻기만 하면 자본 없이도 많은 사람의 청취차를 얻을 수 있게 됐다. 이는 예술계에도 큰 구조 변화를 가져온다. 소셜미디어는 비평가들에게 선택받지 않고도 자신의 창작물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SNS를 통해서 대중의 인정을 받은 예술품들은, 기존 예술계의 위계질서와 별개로 수익을 낼 수 있게 되었다.
SNS 시인 하상욱 씨는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아이콘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평단에서는 고려 대상에서조차 배제되었을 가볍고 유머스러운 문체지만 사람들의 인기를 얻으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대부분의 시가 어렵고 난해해 ‘그들만의 리그’의 제한적인 사람들에게 향유되어 왔다. 그러나 하상욱 시인의 시는 일상적인 언어로 이루어져 있어 친구 일기장을 보는 것처럼 쉽고 편하다. 많은 이들이 시인의 이야기에 공감했고, ‘팬’임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이러한 사례들이 많아지면서 ‘작가’라는 명칭이 가지던 권위가 점차 허물어지고 있다. 글쓰기 전문 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글을 쓴다면 ‘작가’가 될 수 있으며, 그 글이 엘리트 사이에서만 공유되는 기준을 충족시키지 않더라도 괜찮다. 바야흐로 창작이 대중화되는 시대다.


하상욱시인.jpg


대중은 이제 선택을 할 수 있다. 메가폰이 알려주는 것들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기준과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여러 예술 중에서 좋다고 생각하는 예술을 ‘선택’한다. 이들의 선택은 자본을 움직인다. 대중에게 선택받은 예술가는 높은 가치의 예술을 만들어냈다는 인정 하에 물질적 보상을 받는다. 많은 사람이 좋아한다는 것은 바야흐로 새로운 예술 가치 평가의 기준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우리는 대중성이 예술 가치를 과연 온전히 반영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쉽사리 답하지 못한다. 분명 그렇지 못하다는 의심이 존재하지만, 그 의심을 제기하는 순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의 신화가 붕괴하기 때문에 이를 쉽사리 인정하기가 어렵다. 메리토크라시란 능력이나 실적에 따라 지위나 보수가 결정되는 사회를 의미한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자유주의적 신념 위에 건설된 사회다. 우리 사회는 완벽한 메리토크라시가 아니지만, 적어도 관념적으로 능력에 따라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신념은 우리에게 절대적이다. 사실 능력만큼 보상받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것이 드러내는 사회의 비참함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중의 선택으로 인해 물질적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대중의 선택이 예술의 가치를 대변한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메리토크라시의 신화를 포기해야 하니까. 그리고 이러한 결론과 함께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한 예술은 가치가 없는 예술로 매도된다.
 우리는 메리토크라시를 포기하지 못하면서도 이러한 상황에 본능적 거부감을 느낀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술의 가치, 대중성, 자본의 배분, 그리고 메리토크라시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답을 찾지 못하고 갈등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의 가치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갈팡질팡하다가 침묵한다.
침묵의 시대며, 이행(transition)의 시대다. 예술 평가가 소수 엘리트의 손에서 대중에게 넘어가는 순간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앞으로 예술이 어떠한 기준에서 평가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어쩌면 매우 중요한 시기일 수도 있다. 메리토크라시를 포기할 수도, 대중성이 예술을 집어 삼키도록 두어서도, 그렇다고 예술에서 대중을 배제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대중의 선택으로 메리토크라시의 신화를 실현할 수밖에 없다. 한 명 한 명의 선택과 취향으로 우리 사회가 메리토크라시로 다가갈 수도, 멀어질 수도 있다. 우리는 선택을 할 때 그 선택으로 보상을 받는 예술가와 외면당하는 예술가가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개개인의 선택이 모여 누가 인정받는지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선택에는 ‘무엇이 좋은 예술인가’에 대한 고민이 존재해야 한다. 우리의 선택으로 인해, 정말 좋은 예술이 그것이 받아 마땅한 인정과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예술의 가치는 고정될 수 없다. 하나로 결정내릴 수도 없는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생각과 고민이 존재하는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예술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이 이야기해야한다. 예술에 대해서, 무엇이 좋은 예술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발화하고 토론해야한다. 예술을 전공한 소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모두에 대한 이야기다. 모두가 확성기를 쥘 수 있는 시대에, 모두가 그 확성기에 대해 지는 책임이다. 
그러니 고민하자. 무엇이 좋은 예술인지. 어떤 것이 ‘예술답다’고 칭해질 수 있는지. 이 이행이 끝난 이후의 세대에 우리가 물려주고픈 예술은 어떤 것인지.


[이단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