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기댈 수 있는 사람 하나도 사치인가, 연극 '진홍빛 소녀'

글 입력 2016.05.06 23:2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진홍빛소녀 포스터.jpg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연극 <진홍빛 소녀>를 보고 왔습니다. 안타깝고 혼란스러움을 가득 안겨준 공연이었습니다. 프리뷰에서 알고 있던 바와 같이 17년만에 같은 고아원 출신 은진이 어엿한 대학교수가 된 혁을 찾아왔습니다. 혁은 법과 관련된 강의를 하는 교수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살인방조죄 같은 범죄가 될 수 있다면서 멋드러지게 강의를 끝냅니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온 혁의 집에 불을 켜자 은진이 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은진은 단 한가지 질문을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해서 혁을 찾아왔는지 맞춰보라는 겁니다. 제한 시간은 다음 날 새벽 4시. 맞추지 않으면 은진이 납치한 혁의 딸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거절할 수는 없는 상황. 힌트는 친절하게도 세 개가 주어집니다. 시간이 자꾸 흘러갑니다.

 (아래 내용은 연극 내용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상해.jpg
 

  은진은 여러모로 수상합니다. 주인도 없이 불꺼진 남의 집에 들어와있다니 무섭고 소름돋기도 하죠. 17년만에 찾아와 힘들게 여기까지 왔다면서 혁의 집을 제 집마냥 편하게 누비고 있습니다. 경비 아저씨의 도움 없이, 열쇠 없이도 이 집에 들어와 있고 혁이 바쁘다면서 내보내려고 하는데도 한사코 이 집에 있겠다고 합니다. 혼자 깔깔대고 웃다가 걸쭉하게 욕을 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혁을 비꼬는 걸 보니 부담스러운 연인사이같기도 하구요. 어찌 되었든 현재 상황에서 알 수 없이 추억의 불꽃놀이를 하자면서 자기 페이스대로 집주인인 혁의 입장은 고려해주지 않는 은진에게 버럭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는 혁이 그다지 이상하지 않습니다. 혁은 오히려 차분하고 매너있게 그녀를 내보내려고 최선을 다하는 듯 보입니다. 그런 그의 딸을 납치해서 은진은 캐리어에 넣고 그를 꽁꽁 테이프로 묶어두고 자기 할말만 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건 은진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은진보다 혁이 더 수상하고 이상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못됐습니다. 주관적이긴 하겠지만 저는 은진의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안타까웠고 어떤 면에선 공감했기에 혁을 고운 시선으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힌트 세 개 안에는 은진이 혁에게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이 담겨있고 혁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계기이기도 합니다. 은진은 첫번째 힌트로 원장선생님이 밤마다 부르는 이유를 정말 몰랐는지 물었습니다. 예상을 했던 이유이긴 하지만 고아원 '사랑둥지'는 아이러니하게도 원장선생님이 원생인 어린 은진을 성적으로 유린하는 '지옥둥지'였습니다. 혁은 다른 아이들로부터 은진이 밤마다 불려가는데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이미 들었습니다. 


숲속창가.jpeg

 

숲 속 작은 집 창가에 
작은 아이가 있었는데 
토끼 한 마리가 뛰어와
문 두드리며 하는 말
(중략)



  은진이 곤란한 상황에 있는 걸 알면서도 그 원장선생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녔답니다. 혁은 17년전이나 지금이나 솔직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줄 전혀 몰랐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사실을 알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해보았지만 아무도 그를 믿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원장선생님과 원생이라는 위치에서 사실상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건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도 아버지 같다는 둥, 다 이해한다고 쳐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필요는 있었던 걸까요. 사랑하는 은진이 들으면 너무나 상처받을 말인걸요. 은진은 사람이 완벽할 수 없는 것도 알고 있고 침묵으로 방관하는 것도 서럽지만 어쩔 수 없었을 거란 걸 알고 있었을 겁니다. 다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방관할 필요가 있었는지 되묻고 싶었던 거죠.


검은봉투.jpg

 
  두 번째 힌트는 검은쓰레기봉투 이야기에 관한 것입니다. 혁은 역시나 솔직하지 않습니다. 전혀 모르는 이야기라더니 나중엔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합니다. 매번 밤마다 원장선생님께 은진이 불려가는 걸 알게 되고 화가 나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을 수 있게 자극적으로 만든 루머라는 겁니다. 은진 말고도 밤마다 부르는 여자아이들이 있는데 말을 듣지 않으면 검은쓰레기봉투에 아이들을 죽여서 내다 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퍼뜨리고 혁은 이모에게 양자로 입양되어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원장선생님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은진을 알기에 혼자 돈을 열심히 모아서 자신이 사는 집 근처에 은진이 머물 수 있는 고시원 방 한 칸을 겨우 구한 순애보를 펼칩니다.

  그러나 이 검은 쓰레기봉투 이야기는 혁의 의도와 다르게 소중하게 여기던 은진을 더 고통스러운 구렁텅이에 빠뜨리게 합니다. 혁의 잘못이라고 비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가 너무나 엄청납니다. 이 검은쓰레기봉투이야기 때문에 이제 은진은 원장선생님은 물론 원장선생님과 사이에 대해 알게 된 다른 선생님들과 원생들에게 성적 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외부로 도망치려해도 도망칠 수 없고 다른 가해자들은 그녀를 협박하는 용도로 검은 쓰레기 봉투 이야기를 달고 살았다고 합니다. 마치 그들의 행동의 면죄부인 것처럼요.


불꽃.jpg


  마지막은 결국 17년전 고아원 방화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방화사건으로 인해 은진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범죄자가 되었지만 실제 방화를 저지른 것은 혁입니다. 고아원을 나가고도 혁은 은진을 보러 찾아왔는데 그 날 밤에도 원장이 은진을 또 불러내자 은진과 함께 하곤 했던 불꽃놀이 폭죽에 잔뜩 불을 붙였는데 그것이 큰 불로 옮겨붙었다는 겁니다. 은진은 사랑하는 혁, 앞길이 창창한 대학생 혁에게 피해가 되고 싶지 않아서 혁이 고아원에 왔다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혁은 어차피 고아원에 소속된 사람도 아니니 출입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니까요. 은진 이외에 다른 원생들은 밤 중이라 건물의 문이 잠겨서 모두 죽고 은진만 남아서 모든 죄를 지우게 된 상황이 되었습니다.

  은진이 교도소에 들어간 이후에도 혁은 편지도 보내고 면회도 오면서 희망에 가득 찬 말을 속삭입니다. 자신이 구해주겠노라, 책임지겠노라. 은진과 사랑을 나눌 때도 이미 여러 번 하던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내던 편지는 점점 횟수가 줄었고 은진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은진은 너무나 묻고 싶은게 많았던 겁니다. 한번도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은 적도 없었고 자신은 바보같이 사랑하는 혁의 말을 믿었으니까요. 차라리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게 나았을 텐데요.

  혁은 은진을 기억하기 위해서 은진처럼 노래를 잘하고 은진과 나이가 똑같은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왠지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이 드는 건 저 뿐일까요.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차라리 한번쯤은 만나서 이러저러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숨기지 않고 미리 말해주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마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혁은 끝까지 묶인 몸에서 벗어나고 아이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은진을 속입니다. 지금 아내를 버리고 은진과 함께 하겠다고 달콤한 말을 하더니 기회를 엿보면서 손발이 자유로워지자 은진에게 화풀이하듯이 반강간식으로 성관계를 맺습니다. 왜 은진이 성적 노예가 된 게 자기 잘못이냐는 겁니다. 정말 최악이게도 그 수많은 남자들을 은진이 너가 먼저 꼬신게 아니냐, 너도 즐긴게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합니다. 이 쯤되면 혁에게 어디까지 실망해야 하는지 한계를 갱신하는 느낌이었습니다. 혁이야 말로 은진보다도 훨씬 더 망가진 사람같았습니다. 스스로 모든 걸 부정할수록 더 비참해보이는게 아이러니합니다. 그냥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오랜만에 만난 은진을 소중히만 대해주었어도 중간은 갔을텐데요.


케이스.jpg

 
   혁은 초반에 조언이라면서 지나간 일은 사라질 수 없으니 결국 내려놓고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다는 이론적인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은진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고 실은 그것을 실천하려고 했으니 불필요한 조언이었던 셈입니다. 예상대로 은진의 캐리어에는 혁의 딸이 없었습니다. 그 안에는 혁에게 보낸 편지들과 소중한 물건들이 들어있었을 뿐. 그녀는 17년간 쌓였던 것에 약간의 복수를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궁금함을 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또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이제는 완전히 내려놓고 잊을 수 있겠다고 말합니다. 사실 자신이 원했던 것은 혁의 진심이었다면서요. 솔직하게 얘기해주었다면, 지키지 못할 약속은 차라리 하지 않았더라면, 쓸모가 없더라도 자신을 위해 고통스러운 기억의 증인이 되어줄 수 있었더라면. 그 수많은 아쉬움을 이제서야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답니다.

  이 둘이 왜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까요? 기획의도에서 드러나듯이 제도나 환경의 문제 역시 넘어설 수 없습니다. 은진에게 혁의 이모처럼 입양해줄 누군가만 있었더라도 지옥은 짧아졌을 것이고 감옥을 갈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녀의 혐의를 자세히 파고들어서 그녀의 입장을 대변해줄 누군가만 있었더라도 참 좋았을 겁니다. 하지지만 은진에게는 사랑한다고 말을 하며 미진한 행동을 한 혁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소중한 혁이 방화사건의 용의선에서 완전히 제외되고 엄연한 교수로 자리잡는 순탄한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일부러 입을 닫은 게 은진이 할 수 있고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기도 합니다. 혁은 이게 왜 다 자기 잘못이냐고 묻습니다. 물론이죠, 그의 탓이나 잘못이라고 하는 게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조차도 마음 한 구석이 늘 찔리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불쌍한둘.png

 
  극이 끝나면 안타까운 인물은 은진과 혁 둘 다입니다. 둘은 평생 반쪽짜리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은진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으로 평생을 운신이 제한된 감옥에서 지내야 합니다. 그녀는 자유도 없고 성공한 미래나 가정을 꿈꿀 수 없습니다. 혁은 은진에겐 없는 자유와 명예, 안락한 집을 얻었지만 마음은 은진보다도 더 불안하고 조급하기에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혁이 스스로에게도 소중한 사람에게도 솔직하지 못하고 도망만 치는 인물이라 비판할 수도 있지만 그의 말대로 그가 그렇게 잘못한 건 아닙니다. 그는 비겁하지만 사실 그 비겁함은 누구나 갖고 있는 정도의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가 강의했던 내용에 따르면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알면서도 은진을 도와주지 못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잘못이 될 수 있는 것이죠. 그걸 그는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두려움 때문에 따르지 못했던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방관이 범죄가 된 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가 은진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려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고 최소한 이것만은 하지 말았어야 하는 선을 넘어버린 점에서 화살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은진의 말 중에 너무나 마음에 와닿는 한마디 때문이기도 합니다.



"차라리 지키지 못할 말은 안했으면 좋았을 걸.
병신같이 나는 그걸 믿었잖아."

  

   은진은 혁이 정말 자신을 사랑하기는 했는지 그저 자신과 한번 자려고 사랑한다고 한 건 아닌지 혁의 진심을 알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믿을 수도 없고 자신에게만 연이어 나쁜 일이 일어나는게, 가족도 없이 집도 없이 늘 혼자로 살아가는 게  자신이 정말 불행한 존재라서, 자기 때문에 그런건 아닌지 모든게 혼란스러운 상황일 겁니다. 은진만큼이나  저는 다른 이유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연극을 보고 나오는데 왜 연극의 제목이 진홍빛 소녀인지 딱 이거다 싶은 결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은진을 의미하는 소녀일텐데 말이죠. 설레는 꿈들을 갖고 있던 은진이 온몸과 정신에 화상을 입은 것처럼 상처받고 시간이 멈춰버린 소녀로서의 모습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만 해봤습니다. 


2015-12-Life-of-Pix-free-stock-photos-tower-sky-birds-AlexisDoyen.jpg
 


숲 속 작은 집 창가에 
작은 아이가 있었는데 
토끼 한 마리가 뛰어와
문 두드리며 하는 말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저를 살려주지 않으면 사냥꾼이 나를 총으로 빵! 쏠꺼에요'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17년만에 큰 맘먹고 찾아간, 사랑하는 혁에게 강제로 성관계를 당할 때 그녀는 원장선생님에게 밤에게 불려갈때마다 불렀던 그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의 가사를 다 듣고 나서야 어떤 마음으로 그 노래를 불렀을지 이해가 갔습니다. 저는 은진의 사랑이 혼자만의 사랑이었을까봐 두려웠고 그녀가 그 노래를 부르면서 살려달라고 외치면서 편히 쉬게 해줄 집과 가족을 찾았던 그 마음이 너무나 아팠습니다. 기댈 수 있는 사람, 기댈 수 있는 공간 하나를 바라는 것이 사치인 인생도 있는 걸까요. 그래도 그녀는 충분히 강합니다. 혁을 사랑했던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상처만 가득 안고 애써 버텨야 했던 자신을,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억울함과 분노에 더 이상 사로잡히지 않고 그녀는 이제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진홍빛이 과거의 아픔이지만 설레임이란 새로운 미래의 의미였으면 싶은, 외롭지만 강한 연극 <진홍빛 소녀>였습니다. 


-이 리뷰는 문화의 '소통'을 강조하는 ARTinsight와 함께 합니다. 


장지원태그.jpg
 

[장지원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