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진홍빛 소녀』, 많은 생각과 반성을 하게 만드는 연극

글 입력 2016.05.06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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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숭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열린 <진홍빛 소녀>를 보고 왔다. 상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고 기획의도에 비판적 메시지가 담겨있어 기대했던 작품이었다. 내가 봤던 시간대에선 은진 역을 신소현 배우가, 이혁 역을 김형균 배우가 맡았다.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같은 고아원 출신이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두 남녀가 만난다. 은진은 고아원에서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고 무기징역을 선고 받아 형을 지내고 있는 상태다. 반면 이혁은 고아원에 있다가 부유한 집안으로 입양되어 명문대 교수까지 되었다. 은진은 어른이 되어서도 이혁에 대한 배신감과 고아원 사람들이 준 끔찍한 기억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혁은 아무래도 삶이 윤택하게 바뀌어서인지 옛날 과거의 기억도, 은진에 대한 기억도 잊고 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집으로 찾아온 은진 때문에 추악한 과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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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극으로 두 명의 배우가 열연을 했는데,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연기를 매우 잘해서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몰입해서 봤다. 도대체 저 남녀는 어떤 과거를 갖고 있으며 방화사건의 진실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은진이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 하며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다. 두 배우가 대화를 주고받으며 감정이 점점 고조되는데, 나까지 숨죽이며 은진과 이혁의 관계를 지켜보았던 것 같다. 과거 얘기도 거의 대화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나하나 밝혀지는 과정이 지루하지 않았고 속도감 있었다.


연극을 보며 마음 아팠던 이유는, 아무래도 은진이 같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실제로 존재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학대 받는 아동들이나 성범죄 피해자 등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범죄와 폭력의 고통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고 있다. 이들을 제대로 구제시켜줄 수 있는 제도도 미비할 뿐더러 불합리한 법의 처벌 구조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피해자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피해자들을 바라보는 곱지 못한 사회적 시선이다. 은진이 성폭력을 당했을 때 고아원 소년들이 보였던 태도, 그리고 이혁이 은진이를 강간할 때 했던 말들이 이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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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은 단순히 연극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상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우리가 평범하고 안전한 삶을 살아가는 사이 어떤 사람들은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범죄와 폭력, 가난에 시달리고, 환경이 개선되기는 커녕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버려지고 있다. 이혁은 은진에게, 과거는 잊고 새출발하면 된다고 말했지만 은진은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은진이 과거에서 해방되도록 도와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진은 그녀의 부모와 고아원 원장, 친구들,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에게마저 버려졌다. 이런 은진에게 어떤 기회가 왔다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 길은 아무래도 ‘사람들의 관심’이 됐을 것이다. 무관심으로 망가진 삶은 관심으로 치유 받아야하지 않을까. 하지만 은진은 여전히 방화사건 가해자로 알려져 있을 뿐더러 자신이 당했던 범죄에 아무런 보상도, 치료도 받지 못했다. 법적으로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것도 문제지만, 은진의 정신적 고통이 해결되지 않은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은진이 말했던 것처럼, 은진은 여전히 과거에 머무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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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는 이혁 같은 생각을 하고 살았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기 마련이고, 그에 따른 정신적 고통도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그동안 나도 그런 식으로 살아왔고,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논리인지 깨달았다. 그런 논리가 우리의 무관심을 부르고, 그 무관심이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는 데 한 몫 했다. 우리가 약자들을 보호해주지 않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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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과연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과거의 상처가 완전히 사라질 수 있을까?

어떤 상처든 제대로 치유되려면 계기가 필요하다. 은진은 구제 받을 계기도, 기회도 없었다. 아마 이혁처럼 은진의 사정을 아는 누군가가 있었더라도 외면 받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원하는 게 없다는 은진의 심정도 이해했지만, 이혁에게 공감하기도 했다. 편안한 삶을 못 버리면서도 내가 외면하는 건 은연중에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죄책감은 어느 순간 크게 다가온다. 그런 순간이 오면 그 대상에게 미안해하는 마음을 갖지만, 사실 그것도 일시적인 순간에 불과하다. 다시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대부분이다. 이건 타인의 불행에 직면하는 게 그만큼 두렵고 힘들다는 걸 보여주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순 없는 것 같다. 범죄를 방관하면 공범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이, 나또한 해당되는 사항이라 인정하긴 싫지만,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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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빛 소녀>는 정말 많은 생각과 반성을 하게 만드는 연극이었다. 연극을 보고 난 뒤, 나는 앞으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고민했다. 매일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을 바라봐야 할까? 하지만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사실 어떤 게 옳은 건지 잘 모르겠다. 지금으로써 내가 내린 결론은, 함께 사는 사회인만큼 사람들에게 공감하며 살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사회적 약자/피해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것이다.



[이해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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