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글의 고갈 [예술철학]

결국 중요한 것은 내 세계를 쌓아나가는 것, 그리고 그 색깔에 설레하는 것.
글 입력 2016.05.02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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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찾아오는 글들이 있다. 글을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겠는 순간들이 있고, 문장들이 목구멍까지 꾸역꾸역 밀고 올라와서 종이 위에든 컴퓨터 타자 위에든 뱉어놓아야만 하는 지점들이 있다. 나는 여태까지 그런 글들을 써 왔고, 그런 글일수록 글쓰기는 쉬웠다. 글들은 주로 상처들에 뿌리를 두고 내가 아플 때마다 불청객인 듯 구세주인 듯 찾아왔다.

그런데 요즘은 글에 먼저 다가가는 연습을 한다. 그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내가 다가간다고 글의 질이 높아지는 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쥐어짜낸 글은 찾아오는 글보다 질 좋기 어렵다. 그렇지만 찾아오는 글은 꽤나 한정적이다. 우울한 글이 많고, 자기애의 발로일 때가 많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기는 글은 보통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글이 좋은지 좋지 않은지는 우연적인 요소에 큰 영향을 받았다. 운이 좋지 않은 날이면 자기 감정만 꽝꽝 들이쳐대는, 단순한 배설에 가까운 글이 나왔다.

나는 글을 ‘쓸 수밖에 없어서’ 쓰는 게 아니라 내 의지로 선택하고 주체성을 실현하는 창조물로서 쓰고 싶었다. 내가 원할 때, 원하는 주제에 대해서, 원하는 질로 글을 쓰고 싶었다. 내 글의 스타일이 ‘선택’의 결과이길 바라지, 능력의 한계 때문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글이 나오지 않는 날도, 일단 노트북 앞에 앉아서 손을 키보드 위에 올리고 있었다. 써 보지 않은 장르의 글을 써 보았고, 다른 사람이 던져준 주제에 대해서 짧은 시간 안에 글을 써 보기도 했다. 내가 정말 글을 쓰는 커리어를 잡을 거라면, 난 내가 좋아하지 않는 글도 쓸 줄 알아야 했다.

어쨌든 많은 경우 ‘싫다’는 ‘잘 못한다’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싫어하는 것을 열심히 하는 건 ‘싫다’를 ‘좋다’로 바꾸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양한 서술방법으로, 또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쓰는 것은 앞으로 내가 좋아하는 글을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대로 쓰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래서 계속 문을 두드렸고, 열리지 않는 문 앞에 줄창 서 있었다.

그러자 아이러니하게도 더 많은 글이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생각이 늘었다. 언젠가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게워내는 거다. 그래서 글을 많이 쓰면 야윈다.’고 말씀하셨던 교수님이 계셨다. 분명 교수님 말씀대로 찾아오는 글을 쓰는 건 소진이었다. 글을 쓰고 나면 우물에서 물을 퍼낸 것 마냥 벌거벗은 흙바닥이 드러났다. 그런데 글을 찾아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우물에 물이 차 있었다. 글을 쓰는 습관이 붙었고, 그 습관은 글의 내용을 찾는 습관이었으며, 결국 생각하는 습관이 됐다. 세계를 쌓는 습관이 생긴다는 건, 세계의 확장이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빨라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직도 글을 잘 쓰지는 못한다. 요즘은 내가 평생토록 이 문 앞에서 기다려도 글을 잘 쓰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글로 글의 고갈을 막는 법을 깨달았다. 글을 쓰는 것이 세계의 고갈이 아니라 세계의 축적이 될 수 있다. 입력이 있어야 출력이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한다. 제아무리 출력을 많이 해대도, 입력이 부족하면 좋은 출력이 나올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새로이 받아들이고 배우는 게 없으면 좋은 창작을 하기가 어렵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어쩌면 입력과 출력은 딱 구분되어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출력을 하면서, 입력의 습관이 붙는 걸지도 모르고, 또 출력 그 자체가 입력이 될 수도 있다. 정말 중요한 입력은 책에서 읽는 정보들이 아니라 내가 생활에서 느끼는 감각들이고, 그 감각들에 내가 부여하는 생각들과 의미들이다. 출력은 그 의미들을 쌓아서 만들어 내는 공든 탑이다. 탑을 쌓으면 의미들이 쌓인다. 쌓인 의미들은 자기들 사이에서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다. 의미는 의미를 가져오고 생각은 또 다른 생각을 가져온다. 그 지점에서 입력은 출력이 되고, 출력은 의미가 된다. 쌓인 탑은 나를 규정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내 세계다. 생각을 하고 세상을 꼭꼭 씹어 내 색깔을 입힌 탑으로 쌓아내는 문제다. 그래서 갈 길이 멀지만 즐겁다. 내 탑이 어떤 색깔일지, 그 탑에 올라가 내려다보는 내 벌판이 어떤 풍경일지가 기대가 된다. 언젠가 내 세계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이단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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