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름을 견딜 열기로 다가오다 '지난 여름, 갑자기' [시각예술]

글 입력 2016.05.02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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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견딜 열기로 다가오다
<지난 여름 , 갑자기>


SM2_지난 여름, 갑자기 남쪽으로 간다 0000131982ms.png
 

 한 소년이 버스정류장에 앉아 타려던 버스를 타지 않고 이내 결심한 듯 버스 노선을 살핀다. 교복을 입은 한 남자 아이. 화면이 바뀐다. 가정방문 전화를 돌리는 선생으로 보이는 듯한 한 남자. 이내 곧 누군가에게 걸려온 전화. 선생의 표정이 묘하게 굳는다. 한숨을 푹 내쉬고 받는다. 집을 나서자 그를 기다린 듯한 소년의 모습이 화면에 잡힌다. “니네 집은 4시야.”라며 학생을 무시하고 차에 올라타려는 선생. “어차피 가는 길이잖아요.” 라며 이내 학생도 막무가내로 올라탄다.


 이윽고 차는 출발하고 얼마 간 정적 속 선생은 묻는다. “왜 이렇게 귀찮게 구냐. 니가 잘못 봤다니까.” 무엇을 잘못 봤다는 것일까. 의문을 지닌 채 다시 화면이 바뀌고 가정방문을 끝낸 그가 보인다. 그런 선생을 계속 주위에서 맴도는 학생. 선생 경훈은 그를 밀쳐낸다. 하지만 이내 학생은 아랑곳 않고 다시 선생의 차에 올라탄다. 자신의 집 가정방문 차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차에서 내리지 않는다. 그리고 소년이 경훈에게 내민 사진 몇 장. 그것은 경훈의 인생을 뒤바꿔 놓을 그의 은밀한 생활이 담겨있는 사진들이었다. 소년은 사진이 담긴 휴대폰을 그에게 건네며 경훈에게 말한다. “오늘 하루만, 나 하자는 대로 해요.”라고 말이다.



지난 여름 갑자기 사진 2.jpg
 

맹귀우목 (盲龜遇木)
: 눈 먼 거북이가 우연히 물에 뜬 나무 토막을 만나다.

 이송희일 감독의 퀴어 3부작 중 하나인 이 영화는 약 40분의 짧은 러닝타임을 가진다. 영화 속 플롯은 상당히 단순하다. 가정방문을 도는 평범한 한 선생과 그를 졸졸 쫓아다니는 한 남학생의 이야기. 그러나, 두 명의 등장인물과 함께 만들어나간 영화의 내러티브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프레임 속 소년의 일방적인 행위는 영화를 보는 이로 하여금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로 인식되어질 정도로 직선적이며 올곧다. 반면 경훈은 사회에 몸 담아 자신을 감출 수 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선생이 학생 상우를 대하는 태도와 그의 감정변화다. 우연찮게 게이바에서 상우와 마주친 경훈은 그 이후로 상우를 줄곧 피해 다닌다.




"이래도 아니에요? 이 술집에서 그 날 나랑 눈까지 마주쳤으면서"

-상우



 상우가 경훈을 바라보며 던지는 말과 행동들은 수 없이 경훈을 뒤흔들어 놓는다. 이는 사회에 안주해야하는 선생의 삶과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삶에 대한 생각으로 자라난다. 이 상충되는 두 생각들이 자라 경훈을 계속해서 옭아매는 것이다. 게이바에서 마주쳤던 순간 상우가 느꼈던 감정과 경훈이 마주한 감정과 사회를 대하는 자세의 차이, 이러한 두 생각의 거리도 그처럼 계속해서 멀어져 갔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선택하게 되면 현실에 안주하려는 경훈의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될 수 밖에 없다. 비단 그 생각 뿐 아니라 덜컥 사회에서 낙오될 것이라는 현실적 걱정을 하게 되는 나이에 위치한 경훈은 저돌적이고 스스로에 충실한 그가 감당하기엔 너무 두렵고 벅찬 것이다. 이렇듯 사회의 시선은 그를 무겁게 조여온다. 그의 현실은 이 소년이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 달랐으니 말이다.



movie_image.jpg
 


"맞아요 협박. 그러니까 나 하자는 대로 해요.
그냥 오늘 하루만 나 하자는 대로 해요."

-상우



 하지만 그는 결국 상우의 협박 같지도 않던 협박에 응하고 만다. 그가 들려주는 음악. 헤드폰으로부터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그를 지긋이 바라보며 웃는 상우의 모습에 말이다. 허나 곧 그를 순간 멍하니 바라보던 경훈은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그를 옭아맨 사회는 결코 녹록치 않음을. 그는 흔들리는 동공을 감추고 다시 한 번 그를 차갑게 대한다. 선생과 제자, 아니 그 전에 남자와 남자로서 위험하고 불안한 관계라는 걸 인지해야 함을 스스로에게 얘기하듯 말이다. “바지만 입으면 누구라도 졸졸 따라다니는 너같은 피라미들 눈만 감으면 환상이잖아. 내가 왜 널 피했을 거 같아? 두려워서? 아니 귀찮아서.” 그렇기에 경훈은 이렇게 상우가 가진 감정의 정체를 환상이라고 치부한다.



"수업 시간에 자꾸 나 훔쳐봤잖아. 
그럼 나한테 왜 여자친구 있냐고 물어봤어요?
방학 전에 나한테 준 책은. 
그것도 기억 안나요?

선생님도 나한테 관심 있었잖아."

-상우


 그들의 위태롭던 감정의 교류는 해질녘에 클라이 막스에 도달한다. 전 날 상우가 자신을 기다렸던 흔적들을 발견한다. 미처 떠나지 못하고 다시 한 번 그의 문을 두드리는 상우. 그러나, 경훈은 그를 애써 외면한 채 집으로 들어간다. 그 미련함이 너무도 멍청하고 멋모르는 것 같아서, 앞으로 다가올 이 사회의 눈총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아서. 뇌리를 교차하는 만감은 경훈으로 하여금 상우에게 주먹질을 하고야 만다. 나동그라진 상우. 경훈은 이내 상우의 상처받은 눈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에 흔들리지 않을듯 다시 일어나는 그의 모습에 울먹인채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상우를 껴안는다.



 무더운 여름에 미쳐 그를 부둥켜 안은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상우가 가진 열기가 지금 온 세상을 내리쬐는 여름의 빛보다 더욱 뜨겁다는 것을 그는 느낀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열기. 그것은 감당할 수 없던 ‘다름’이 아닌 ‘틀림’의 무게를 지게끔 했던 사회와 그 시선에게 익숙해져 있던 경훈에겐 너무도 강렬한 노을의 빛처럼 눈이 아파올 정도의 것이었다. 선생의 뺨을 타고 흐르는 땀줄기, 상우의 눈물 한 방울. 그들을 훑고, 파고 들었던 한 여름의 열기가 남기고 간 흔적들이다. 그와 더불어 단 한번도 사용되지 않던 배경음악이 그들의 포옹과 함께 스멀스멀 영화를 지배한며 둘의 열기를 더욱 가중시킨다. 지난 여름, 갑자기 그들에게 찾아온 그 열기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하는거야’라는 선명한 가사는 보는 이로 하여금 이 영화의 엔딩을 다시 한 번 깊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게 만든다.



지난 여름 갑자기 사진 1.jpg
 

 무더운 여름. 그리고 그 여름을 견딜 또 다른 열기처럼 그 소년은 다가왔다. 아직은 앳된 소년이 자극한 원초의 본능. 나가라며 소리치던 선생을 끌어안으며 상우는 속삭인다. "나한테만 말해줘요." 그 말 한마디는 경훈의 눈에 비춰진 무덥기만 했던 한여름을 보내는 노을빛처럼 빛나게 만든다. 맹귀우목. 자신을 보지 않으려 하는 한 맹인을 조용히 이끈 한 나무 토막처럼 상우는 결국 경훈을 외면하기만 했던 스스로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이끈다.






[이호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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