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바틀비와 신입사원 : 우리 사회의 '을'들의 운명은? [문학]

허먼멜빌과 TVN
글 입력 2016.04.24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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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틀비와 장그래 : 우리 사회의 '을'들의 운명은?


  ‘고답이’라는 신조어를 아는가? ‘고구마를 100개 먹은 것처럼 속이 답답하다’는 뜻을 가진 인터넷 유행어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고구마를 한꺼번에 많이 먹고 가슴이 답답한 것을 경험해 본 적 있을 것이다. 사람이 융통성이 없고 답답하면 그 사람을 일컬어 '고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나는 오늘 이 ‘고답이’라는 단어에 그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인물을 한 명 찾게 된 것 같다.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 나오는 주인공, 바틀비이다. 그리 길지도 않은 이 중단편의 이 소설 한 편을 읽는 데에는 채 1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일명 ‘고답’인 기분을 스무 번 정도 느끼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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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인 나는 여러 면에서 소설 속의 화자, ‘나’와 비슷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나는 다른 어떤 생산적이거나 보람찬 행위를 하는 것보다도‘육체가 편안한’ 활동을 가장 선호한다.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경치가 뛰어난 곳에 여행을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도 물론 좋아하지만, 내 방 침대에서 눈이 떠질 때까지 잠을 자고 일어난 순간에 더 높은 정도의 쾌락을 느끼는 것 같다. 이런 나의 평소 성향은 이상적인 삶에 대한 의견으로까지 이어진다. 만약 주변 사람들에게 ‘장래희망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본다면 대부분 경제적 수입이 많은 직업을 갖는 것,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어 인정받는 것, 어려운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 등 이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몸이 편하게 사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필경사 바틀비>속에 등장하는 화자인 ‘나’역시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우선, 나는 젊을 때부터 줄곧 편하게 사는 것이 제일이라는 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이다. 따라서, 하도 격렬하고 신경을 곤두서게 해서 때때로 소동이 일어나기까지 하는 것으로 소문난 직업에 종사하지만 그런 종류의 고충 때문에 내 평화가 침해되는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배심원단 앞에서 열변을 토하거나 대중의 갈채를 불러일으키는 일은 일절 하지 않고 혼자 조용히 아늑한 사무실에 처박혀 부자들의 채권, 저당증서, 부동산 권리증서 등을 쌓아놓고 수지맞는 일을 하는, 그런 야심 없는 변호사 중 하나이다.” (50) 



   소설 속 화자가 자신의 성격에 대해서 서술하는 이 부분에서는 나와 너무 생각이 비슷해서 놀랐고 반가웠다. 나는 변호사는 아니지만, 만약 내가 변호사였다면 화자와 같은 부류가 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내가 특이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나와 이렇게도 비슷한 사람을 150년전 미국 소설에서 만나게 되다니! 내가 화자와 나를 이렇게 비슷한 종류의 사람으로 분류한 것은, 내가 바틀비에게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답답한’ 심정을 여러 번 느낀 것과도 연결된다. 소설 속에서 화자 또한 바틀비가 ‘그렇게 하지 않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때마다 화자는 황당함, 어이없음, 분노 등의 감정을 느낀다.



“나의 놀라움, 아니 대경실색을 상상해보라.”(60),
“나는 크게 흥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걸어가며 그 말을 되풀이했다.
”무슨 소리야? 자네 미쳤어?“‘(61),
”잠시 동안 나는 소금 기둥으로 변해, 줄지어 앉은 직원들 맨 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62) 



    이러한 구절들에서, 바틀비의 태도에 대해 나는 화자와 매번 동일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간단한 심부름 같은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 심지어는 필사 검토 등과 같이 ’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일‘까지 하지 않겠다고 무조건 버티는 바틀비는 융통성이라곤 없는 꽉 막힌 사람일 뿐만 아니라 윗사람에게 예의 없는 무례한 사람으로까지 비춰졌다. 내 주변에 실재하는 사람이었다면 분명 나의 미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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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가 문득,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 방영한 드라마<미생>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극 중에서 상사들은 부하 직원인 안영이에게 끊임없이 지시를 내리지만 이는 공식적인 업무가 아닌 자기들의 사적인 잔심부름 요구였다. 선배들은 아무렇지 않게 안영이를 부르며 "안영이, 내 책상 좀 닦아라" "안영이, 구두방에 가서 내 구두 닦은 것을 찾아와라" "안영이, 내가 피는 담배, 스타킹 좀 사와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여자 주인공은 그러한 요구를,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위협적인 말로써 거절했던 바틀비와 다르게, 거절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수행한다. 그 때 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대학생으로서, 취업준비생으로서 이 장면을 보면서 2년 남짓의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화와 울분을 터뜨렸던 기억이 난다. 한국 기업문화의 고쳐야 할 문화라면서 여자 주인공 안영이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봤었다. 그런데, 그랬던 내가 왜 <필경사 바틀비>속 바틀비는 답답하며 무례한 사람으로 치부하고 화를 내며 그를 미워하고 있을까? <미생>은 취업준비생의 입장에서 부하 직원의 시선으로 감상하였고, <필경사 바틀비>는 작품 초반부터 성격상의 동질감을 느낀 상사의 입장에서 감상하였기 때문일까? 어쩌면 나 또한 이미 자본주의 현실에 무의식중에 흡수되어버린 군상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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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경사 바틀비는 다소 답답하고 융통성이 없으며, 상대방을 불쾌하게 할 만큼 일관된 고집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바틀비의 처세가 옳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필사’일을 하는 조건으로 취직이 된 것이고 따라서 우체국 심부름이나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것 같은 일은 할 의무가 없다. 필사를 검토하는 일도 관습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여겨지는’ 것 일 뿐 원래는 바틀비의 맡은 업무가 아니다 또한 앞에서 나는 바틀비가 윗사람에게 무례하다고 말했었는데, 어쩌면 자신이 할 일이 아닌 것을 “하지 않겠다.” 또는 “안 할 것이다”라고 매우 단호하게 말하는 대신 좀 더 유순한 표현인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무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손한 것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옳은 일을 행하는 바틀비에게 화를 내고 ‘미친 사람’이라고 까지 칭하는 소설 속 다른 인물들 (나, 터키, 니퍼즈)의 태도를 통해서, 소설이 쓰여 질 당시 미국 사회에 자본주의가 초래한 암묵적인 계급주의와 비인간적 사회구조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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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화자의 법률사무소가 위치한 미국 뉴욕 맨해튼 월가는 자본주의의 심장`으로 불리는 곳이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적 장소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소외된 삶을 살다간 바틀비의 삶을 통해, 작가 허먼 멜빌은 자본주의가 가져온 비인간적 사회 구조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이 곳에서 부자 의뢰인,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계급의 권익을 위해서 일하는 화자는 그 가치관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네 사람의 등장인물이 상주하는 법률 사무소 내부의 구조에서도 드러난다. 사무실을 꽉 둘러싸고 있는 네 면의 벽과 바깥의 풍경도 거의 조망할 수 없는 창문들은 삭막하고 압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또한, 법률 사무소 안의 공간은 철저하게 계급에 따라 구획되어 있는데,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한 쪽은 상사인 변호사가, 다른 한 쪽은 피고용인인 필경사들이 사용한다. 여기서, 계급이 없는 평등한 사회라는 현대 사회의 이상과 달리 현실 세계의 미국은 암묵적으로 폐쇄적인 계급 사회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화자는 자신이 주는 월급에 권력을 불어넣어, 세 명의 피고용인에게 계급논리를 내세우며 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는 고용주로서 권력을 행사한다. 이에 비록 “수동적인 저항”이지만 자본주의 위계질서 및 비인간적인 사회구조에 대한 반항을 하는 바틀비는 월가가 상징하는 자본주의 위계질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이러한 반항적인 인물의 죽음으로 끝이 나고 마는데, 이는 19세기 중반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을 잘 드러낸다.


     당시의 미국 사회 뿐만 아니라,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회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미생>속 한 장면뿐만 아니라 주변 선배들의 경험담을 통해서, 뉴스 보도 속 사례들을 통해서 한국의 잘못된 기업문화와 그 속에 잔재하는 계급사회의 모습을 보고 듣는다. <필경사 바틀비>속에서 묘사된 자본주의가 가져온 비인간적 사회 현실은, 150년에 지난 오늘날까지 개선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이미 그러한 제도에 반강제적으로 구겨 넣어진 것 같다. 이번 작품을 읽는 동안, 화자를 옹호했던 나 자신의 감상에 놀랐지만, 결국은 계급주의적이고 비인간적인 우리 사회 구조의 문제점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자각하고 있는 우리들은 바틀비처럼 이런 비인간적인 사회구조에 저항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바틀비처럼 외롭고 비참하게 끝나지 않기 위해서, 이에 순응하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안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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