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미학 #1 [예술철학]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
글 입력 2016.04.23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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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미학 #1
아도르노의 문화산업론
 

 
철학 책을 읽다 보면 ‘프랑크푸르트 학파’라는 단어가 책장 사이서 고개를 들이밀 때가 있다. 이름도 복잡해서 자꾸만 후랑크 소시지 같은 게 눈 앞에 왔다갔다 하면서 주의를 흐트러뜨린다. 자주 나오긴 하는데, 뭐 하는 학파인지도 모르겠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어떤 걸 주장했니”라고 물어봐도 “음, 뭐, 이것저것 했는데”하는 두루뭉술한 답변만 돌아온다.

이번 글은 그래서 이놈의 소시지가 무엇 하는 사람들인지 궁금했던 이들을 위한 글이다. 이 사람들은 뭘 하는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은 어떤 예술을 제시했는지에 대해서 앞으로 몇 주에 걸쳐 찬찬히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일단 ‘프랑크푸르트’는 소시지가 아니라 독일에 있는 대학 이름이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만든 연구소가 하나 있는데, 그 연구소에 소속된 사람들이 이룬 학파가 바로 프랑크푸르트 학파다.
 
보통 어떤 학파라 하면 주장하는 바가 하나로 모아져야 할 것만 같다. 안타깝게도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그렇지 않다.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적 학자로 꼽히는 아도르노, 벤야민, 호르크하이머, 하버마스 등은 각자 서로와 완전히 반대 입장을 가진 이론을 여럿 내놓았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이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에 기반해 있다는 점이다.
 
당시 유럽은 마르크스의 예언과 달리 자본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노동자들은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고, 오히려 전체주의 세력이 유럽 중부에서 권력을 잡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했다. 프랑크푸르트 학자들은 바로 이 혼란에 답하고자 했던 사람들이다. 학자에 따라 서로 다른 답을 내리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사회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구조를 띄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체제를 받아들인다. 여기서 상부구조란 법적, 정치적 구조를 의미하고 하부구조는 경제구조를 의미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의하여 지배되고,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물질적으로 종속될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종속된다.
 
테오도르 아도르노 또한 이런 세계관 아래에서 왜 노동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로 대중예술을 꼽았다. 매스미디어가 생산하고 유통하는 대중문화가 사회를 은폐하고 왜곡시키기 때문에 노동혁명이 일어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부정적인 대중예술을 ‘문화산업’이라고 불렀고, 이에 대한 아도르노의 이론을 ‘문화산업론’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문화산업이란 대량생산 체제가 만들어낸 상품으로서의 문화다. 아도르노는 “문화 산업은 의도적으로 위로부터 소비자들을 통합한다. 대중은 일차적인 존재가 아니고 부차적이며, 그들은 (이익 창출을 위한) 수지 계산의 대상이자, 조직적 기구의 부속물”로 전락한다고 말한다. 그는 “문화산업 자체가 생존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중들에게 적응/영합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대중은 문화 산업의 잣대가 아니라 문화 산업을 들먹이는 데 필요한 이데올로기다”라며 문화산업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아도르노는 워낙에 글을 더럽게 쓰기로 유명한 학자이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않아도 좋다. 이제 이 말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사실상 아도르노가 하는 말은 우리가 매일 소파에 누워 리모콘을 까닥이며 하는 생각과 별 다를 바 없다. 이 프로나, 저 프로나 다 똑같다는 거다. 매스미디어는 매번 문화상품의 포장지를 바꾸어 가면서 우리에게 “넌 너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어!”라고 열심히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포장지를 벗기고 보면 다 비슷비슷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다는 말이다. 시크릿 가든이나, 꽃보다 남자나, 결국은 재벌 2세가 여자랑 사랑하는 이야기 그 뿐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왜 매스미디어는 ‘새로운’ 것을 만들지 않을까? 뻔하다. 망하면 돈이 안되니까. 꽃보다 남자가 대박을 쳤으니, 비슷한 걸 내놓아서 또 대박을 치고 싶은 거다. 이미 검증된 인기상품이 있는데, 굳이 ‘실험적인 드라마’를 만들 필요가 없는 거다. 드라마는 상품이니까, 시청률이 좋냐 나쁘냐만 중요하지 그 드라마가 예술적으로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는 병아리 눈물만큼도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다.
 
내용이 변하지 않는다는 건 알겠는데, 그게 마르크스의 노동혁명이 무산된 것과 어떤 관계가 있냐고? 그 변함 없다는 알맹이가 문제다. 드라마 PD는 사장 눈치를 봐야한다. 사장 눈에 거슬리는 내용은 드라마에 나올 수 없다. 사장은 사회의 자본가다. 그 뿐인가, 다른 자본가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자본가다. 다른 자본가들에게 광고를 받기 위해서 잘 보여야 하는 자본가다. 그런데, 자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드라마가 TV에 나올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문화산업은 철저히 자본가의 검열을 거치는 대중예술이고, 사회 전체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수단이 된다. 그래서 채널을 돌려도 돌려도, 자본가의 눈으로 바라본 사회만 왈칵왈칵 쏟아져 나온다. 마치 그게 사회의 전부인 양 그 앞에 멍청히 앉아 있는 사람들의 뇌를 표백해 버리는거다.
 
아도르노는 예술이 경험적 현실을 부정하고 비판적일 때, 그리고 사회의 아픔을 고발할 때 진정한 예술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문화산업은 절대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없다. 자율적이지 못하기에 비판 또한 불가하며, 획일적 대량생산의 산물이기 때문에 진정한 예술과는 구분된다. 따라서 결국 시장판매의 목적이 예술의 무목적 영역을 흡수해 버리는 사태를 초래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문화산업은 대중을 수동적이고 적극적 사유가 불가능한 존재로 만들어 버릴 뿐 아니라 그 통일성과 동질성으로 선택권을 앗아간다. 문화산업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매스미디어는 따라서 본질적으로 부정적이며, 인간 발전을 위해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아도르노는 결론 내린다.
 
이번 글에서는 아도르노가 대중예술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다음 글에서는 아도르노가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에 대해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


[이단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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