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봄, 취하다. [문화전반]

글 입력 2016.04.12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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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취하다.”

 우리는 봄에 취한다.
 '봄'이라는 말이 주는 마력은 엄청나다. '봄봄봄'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노래조차도 '산뜻'하게, 또 '행복'하게 들릴 정도로 '봄'이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주는 매력은 크다. 봄은 설레고, 들뜬다.  그 설렘과 들뜸 때문에 홀로도 잘 살던 이도 이 때만큼은 외롭다 말하고, '벚꽃을 보러갈 사람'이 없는 사람들은 왠지 모를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그 설렘과 들뜸은 만남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만든다. 봄은 갓 20살이 된 대학 새내기들은 물론, 고학번, 직장인 할 것 없이 가장 많이 커플이 되는 시기이다. 벚꽃이 피는 곳은 그 어디랄 것 없이 '명소'가 되고, '축제'의 장이 된다. 봄이 짧아져서인지, 사람들은 더욱 치열하게 봄을 즐긴다. 그 짧은 동안 어떻게든 봄을 즐겨보고자 한다.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기도 전에 거리에는 봄을 노래하는 음악들이 울려 퍼지고 타임라인은 벚꽃으로 물든다. 꽃이 피기도 전에 누구랄 것도 없이 원색의 옷을 꺼내 입고 그 스스로가 꽃이 된다. 따스함, 벚꽃, 설렘. 사랑. 시작. ‘봄’이라는 것이 마법이라도 되듯 모두가 이러한 감정에 젖고, 이러한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봄을 즐긴다기보다는, ‘봄’이라는 계절에 취하는 듯 하다.

 한 계절이 사람들에게 이렇게까지나 지배적인 정서를 만드는 것은 문화적으로 해석하기에 매력적이다. 모두가 취해가는 ‘봄’은, 이젠 ‘봄’이라는 계절을 넘어 ‘문화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하다. 이런 계절, 문화현상에 대해 ‘문화’를 말한다고 하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당연스레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한발짝 떨어져서 다시 보는 것일 테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보는 것. 하지만 봄을 낯설게 보는 행위자체도 이제는 ‘낯설지’않게 되었다. 다른 모두와 함께 문화도 봄을 논한다. 당장에 아트인사이트만 봐도 봄과 벚꽃에 대한 이야기가 수도 없이 올라와있다. 봄에 대해 해석하고 또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만, 결국 그들도 그저 봄에 취한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마 이 글도 그러한 글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나 또한 ‘낯설게’ 본다는 핑계로,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봄에 취하고자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내가 그저 봄에 취했더라도. 나는, 더욱 열심히 취하기 위해 봄을 해석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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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따스함.”

 봄은 미묘하다. 혹자는 ‘따듯’하다고 말하겠지만, 실상 봄은 ‘따듯’하지만은 않다. 초반엔 꽃샘추위 때문에 겨울의 끝물보다 추우며, 그게 지나갔다고 해도 절대 ‘포근’하지만은 않다. 어마어마한 일교차에 낮엔 덥고 밤엔 추운 나날들의 반복일 뿐이다. ‘봄’!하면 대표적인 이미지는 ‘따스함’이지만, 실상 ‘따스한’ 순간들은 오후쯤에서 저녁이 되기 전까지의, 하루의 반도 안 되는 순간 들이다.그런데도 사람들은 봄은 ‘따듯’하다고 말한다. 실상 가을이랑 비슷한 날씨인데도, 각 계절을 대표하는 말을 할때면 가을은 ‘쌀쌀’하고 봄은 ‘따듯’하다고 말한다. 따듯, 더움, 쌀쌀, 추움. 네 가지 단어 중 가장 긍정적 어감을 띠는 단어는 ‘따듯’하다는 말이다. 그런만큼 어쩌면 따듯’하다는 봄의 그 이미지는 사람들이 봄에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왜 봄은 ‘따듯’하고 가을은 ‘쌀쌀’한 걸까?

 답은 간단하다. 기온은 비슷하더라도 봄은 ‘더워지는’ 시기이고 가을은 ‘추워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날씨 자체는 비슷하더라도 이 차이가 주는 것은 엄청나다. 이는 결말을 아는 연극을 보는 것과 같다. 끝이 해피엔딩인 것을 알고 있다면, 끝이 따스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 앞에 서글픈 장면도 서글프지만은 않다. 그 후에 따스한 순간이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이 새드엔딩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앞의 행복한 순간들도 무척이나 서글프게 다가온다. 저렇게나 행복했던 저들이 결국 불행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 순간이 아름다워서 더욱 서글프다. 마찬가지다. 곧 여름이 올 것을 알고 있는 봄은 쌀쌀한 날씨조차도 포근하게 인식하게 한다. 이 순간만 지나면 따스해 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 곧 겨울이 다가올 것을 알고 있는 가을은 따스한 날씨조차도 쌀쌀하게 인식하게 한다. 이 순간 따스하더라도, 곧 추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어떠한 스토리를 보듯. 우리는 그러한 맥락상에서 계절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야기’의 한 대목인 ‘봄’은, 추움으로 대표되는 모든 시련이 가고 따스함이라 대표되는 행복이 오는 시기이다. 실제로는 어떻든 그 상징적 ‘행복’이 사람들이 봄을 사랑하게 만드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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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시작.”

 봄은 ‘시작’을 은유한다. 사실 실질적으로 한 해의 시작은 1,2월. 즉 겨울이지만, 사람들은 ‘겨울’은 끝으로 받아들이고, 봄을 ‘시작’으로 받아들인다. 시작과 끝. 그 중 어떤 것이 더욱 긍정적인 어감을 띠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분명 ‘시작’이라는 이미지 또한 사람들이 봄에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봄을 시작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봄이 ‘4계절’중 처음이라서? 혹시 봄에 새 학기가 시작되어서는 아닐까? 여러 가지를 생각 해 볼 수 있고, 또 저러한 것들 또한 봄이 ‘시작’으로 받아들이는데 영향을 미쳤겠지만, 나는 궁극적인 이유는 모든 것이 깨어나는 시기라서, 라고 생각한다.

  식물에게도, 동물에게도 겨울은 ‘죽음’을 의미한다. 식물들은 모든 잎을 떨어뜨려 앙상한 나뭇가지만을 남기고, 동물들은 겨울잠에 빠진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겨울은 ‘멈춰있다.’ 실질적인 죽음이 아니더라도, ‘생명력’이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죽음’에 비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의 경우는 다른 동식물처럼 ‘생명력’이 사라지진 않지만, 추워지는 날씨에 점점 외출이 적어진다는 점에서 ‘생명력’이 감소했다는 맥락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렇게 ‘죽어있던’ 것들이, 봄이 되면 다시 깨어난다. 식물들은 새 잎이 나기 시작하고 이내 겨우내 준비했던 꽃망울을 떠뜨리며 동물들은 단잠에서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겨울을 ‘죽음’으로 봤을 때 ‘봄’은 ‘재생’을 넘어서, 작년과는 또 다른 ‘생명’의 시작이다. 봄은 생명이 태동하기 시작하는 시기인 것이다. 사람들 또한, 봄엔 겨우내 굳어있던. 혹은 많은 시간 이불 속에 덮혀있던 몸을 일으켜 밖으로 향한다. 겨우내 실내 위주로 있던 만큼, 봄은 실내에 있기보다는 실외로 나가고자 한다. 다시금 ‘생명력’을 부여받은 것이다. 

 또한 밤과 낮이라는, 또 다른 끝과 시작으로 비견되는 것들의 길이도 봄을 ‘생명’의 시작으로 가리킨다. 겨울은 하루의 끝, 그 하루의 죽음을 의미하는 ‘밤’이 길어지는 시기이다. 강력한 생명력을 대표하는 태양이 오래도록 자취를 감추는 시기. 그 기나긴 어둠은 겨울을 더더욱 죽어있게 만든다. 반면 봄은, 서서히 낮이 길어지는 시기이다. 태양이라는 ‘생명’이 힘을 얻기 시작한 때. 비록 여름만큼 해가 길지는 않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봄은 ‘시작’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모든 것이 강렬한 생명력이랑은 또 다른 풋풋함이 봄을 더더욱 ‘시작’ 답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렇듯 봄은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시기이기에 봄은 ‘시작’이란 의미를 부여받았다. 사람들은 그 ‘시작’들에, 풋풋함에 괜히 설레며 더더욱 봄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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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사랑.”

 봄, 하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키워드는 ‘연애’이다. 서론에서 언급했듯 봄은, 특히 벚꽃을 시작으로 꽃들이 만발하는 시기는 가장 많은 커플들이 생성되는 시기이다. 그 순간만큼은 ‘벚꽃을 보러 갈 사람’이 있는 이들이 위너가 되어 홀로 잘 살아가던 사람들조차도 그들을 부러워하게 된다. ‘벚꽃’이 마치 설렘의 전도사마냥 사람들은 벚꽃을 보며 설레하고, 사랑을, 연애를 갈망한다. 심지어는 벚꽃이 필 때 사귀었다가 벚꽃이 지면 헤어지는 커플들이 속출하기도 한다. 이런 것을 보면 ‘봄’이란 것 자체가 ‘사랑’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봄’에 ‘사랑’을 느낄까? ‘사랑’의 열정에 대변되는 계절은 여름이 더 잘 맞을 텐데 말이다. 

 나는 이에 대한 답을 진부하게도 ‘’꽃’으로 말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은 꽃이 단지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봄은 ‘시작’을, ‘생명’을 의미한다. 봄에 피는 꽃은 그 새로운 삶의 증거이며, 과실로 맺어지기 위한 첫 발걸음이다. 모든 새끼, 아이는 사랑스럽듯 모든 시작하는 것들은 사랑스럽다. ‘시작’, 그것도 ‘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들은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으로 꽃도 사랑스럽다. 사랑받기 위해서(물론 그 대상이 사람은 아니지만) 고운 자태로, 또 진한 향으로 자신을 뽐내기까지 하는 꽃이 사랑스럽지 않을 리가 없다.  봄은 이러한 꽃이 만발하는 시기이다. 벚꽃이, 유채꽃이, 튤립이. 하나 둘 피는 정도가 아니라 다같이 ‘만발’한다. 특히 벚꽃은 벚꽃 잎이 울려 퍼진다는 한 가사처럼 한 순간 온 거리를 물들인다. 온 거리가 ‘사랑스러운 꽃’. 즉 ‘사랑’’으로 가득 차는 것이다. 봄은 그렇기에 ‘사랑’을 상징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랑’의 한 복판에서는 도저히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봄은 앞서 말했던 ‘시작’이란 느낌과 따스함, 꽃의 ‘사랑’과 더불어 ‘풋풋한 사랑’이란 이미지를 형성해낸다. 열정적인 사랑과는 다른, 살랑거리는 꽃잎과도 같은, ‘사랑’과, ‘시작’이란 말이 주는. 혹은 두 가지를 합쳤을 때 나오는 어딘가 간질거리는 그 감정. 정열의 붉은 색 보다는 벚꽃잎과 같은 분홍색이 어울릴 듯한 그 감정. 이러한 감정은 ‘이성애’를 말할 때 가장 대표적으로 묘사되는 감정이며 연애를 시작하기에 가장 알맞은 감정이다. 또한 그 색채나, 꽃의 ‘사랑스러움’ 때문인지 벚꽃으로 대표되는 감정이기도 하고 말이다. 봄이 유발해내는 이러한 감정, 이미지는 많은 사람들을 들뜨게 만들고 이는 곧 관계에 대해 관대해지게 만든다. 봄이 주는 마법이 사람들을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 상대는 ‘벚꽃 보러갈 사람’이라는 말로 대표된다. 그 마법의 종착지는 함께 벚꽃을 보는 행위가 된다. 애매모호한 관계에서 그 행위로써 ‘썸’이 되고 ‘연인’이 된다. ‘사랑’이 넘쳐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따스한’ 연애는 봄이, 특히 벚꽃이 나타내는 그것과 많이 닮아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꽃이라는 사랑이, 특히 ‘벚꽃’이 주는 그 풋풋한 사랑의 시작이. 사람들이 봄을 사랑 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다시금 봄, 취하다."


우리는 봄에 취한다.
모두가 봄에 취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문화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모두는 '봄'에 취한다. 그 이유를 나름대로는 분석을 해 보았지만, 글쎄. 이렇게나 길게 글을 쓰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우습지만 사람들이 봄에 취하는 이유는 그저 '봄이라서'일지도 모른다. 무슨 말이냐고? 나도 모른다. 그저 그만큼, '봄'은 그저 '봄'이기에 가치있다. 사실 나름대로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사람으로써 모두가 홀린듯, 혹은 세뇌당한 듯 봄에 취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만은 없는데, 본인도 봄에 취해서인지 '봄'만은 예외로 치고싶다. 따스한 시작의, 사랑의 봄만은. 그 짧은 기간만큼은. 모두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봄에 취해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 남들과 똑같은 벚꽃놀이든, 혹은 연애든, 혹은 그 무엇이든 남과 같든 다르든. 그저 각자 봄에 취해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 짧은 시간의 설렘이, 풋풋함이 1년을 잘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를. 또 다른 봄이 올 때까지, '다음' 시작이 올 때까지 '이번'을 잘 살아낼 수 있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 이번이 끝나고서 다음 봄 또한 취할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는 봄에 취한다. 그리고 다시금, 봄에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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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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