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느날 타인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면? 영화 < 아노말리사 >[시각예술]

글 입력 2016.04.06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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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목소리는 기적 같아요."

 

영화는 수많은 같은 목소리들이 다른 이야기를 하는 비행기 안의 음성으로 시작된다. 시작부터 약간의 메스꺼움을 느낀 것 같다. 비행기 멀미때문인지 아니면 같은 목소리들이 만들어내는 부자연스러움에 속이 불편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주인공 마이클은 고객관리에 관한 유명한 책을 저술한 작가이다. 그는 신시내티로 강연을 하러 왔지만 동시에 옛 인연이던 벨라를 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호텔에 도착해서 벨라에게 전화를 한 그는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한 벨라를 제대로 찾지 못한다. 그는 모두가 같은 얼굴로 보이고 같은 목소리로 들리는 '프레골리 증후군'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벨라를 만나자 마자 잠깐의 대화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벨라를 데려가려 하지만 차갑게 거절당한다. 혼자 방에 돌아와 샤워를 하던 중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 허겁지겁 옷을 입고 그 목소리를 찾아 빽빽한 호텔 방 문을 모두 두드리고 마침내 리사를 찾아낸다. 얼굴 옆에 흉터가 있고 자존감이 낮은 리사이지만 마이클에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유일한' 기적같은 사람이 된다. 그렇게 둘은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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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은 지하에서 수많은 똑같은 얼굴들이 마이클에 대한 사랑을 갈구하고, 이에 도망치다가 자신의 얼굴이 떨어져 나가는 기괴한 악몽을 꾼다. 그 후 리사와 아침식사를 하는데 이때부터 리사의 목소리가 서서히 타인들의 목소리와 겹쳐지게 되고 결국 타인의 목소리와 동일하게 들리게 된다. 이 묘사는 결국 마이클이 하룻밤의 욕망을 채운 후에 리사에게도 권태를 느끼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강연을 마치고 마이클은 집에 돌아온다. 집에는 같은 얼굴을 한 아내, 아들, 친척들이 반갑게 그를 맞이하고, 그는 성인용품 가게에서 산 일본 인형이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멍한 표정을 짓는다. 아예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지구 반대편의 일본 인형의 노래만이 그의 권태로움과 고독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일까.
 
 
마이클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은 동정의 대상이다. 모두가 똑같이 보이고 똑같이 들리기에 누군가와 긴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도 없고 사람을 구분하는 것 조차 불가능하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매우 지겨운 일일 것이다. 이것은 마이클이 호텔에서 룸서비스를 주문할 때 메뉴를 설명하는 직원의 말을 빠르게 자르는 태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어쩌면 세상을 이렇게 보게 된 것이 애초에 그가 자초한 일일 수도 있다. 마이클이 이렇게 권태로운 세상 속에서도 고객 개인들을 이해하며 맞추는 서비스를 제공해야한다는 강연과 도서들을 판매하는 등 이윤을 쫓는 위선적인 태도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중년 남성으로서 느끼는 세상에 대한 무관심과 권태로움을 전혀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묘사하는 감독의 자기고백적인 영화인 셈이다. 하지만 감독은 리사라는 '아노말리(변칙)'한 캐릭터를 통해 희망을 제시한다. 이미 권태의 늪에 빠져버린 마이클을 구제할 수는 없었지만 리사는 낮은 자존감의 늪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되찾기 때문이다.
 
 
 
"왜 스톱 애니메이션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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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네이버)
 

권태에 찌든 중년 남성의 심리, 군중 속의 고독은 찰리 카우프만의 오랜 주제이다. 새로울 것 없는 이 주제가 스톱 애니메이션과 만났고, 그 권태로움이 적나라하고 솔직한 묘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스톱 애니메이션은 1초에 24프레임의 영상을 표현하기 위해 이미지를 직접 24번 움직여야 하는 비효율적인 작업이다. 베드신을 찍는데에 자그마치 6개월이 소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이 장르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정말 '진짜 같은'영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진짜가 아닌, 애니메이션'임을 끊임 없이 보여줌을 통해 판타지임에도 너무나 현실 같은 모순적인 상황을 관객이 경험하도록 한 것이 아닐까.
 
 
영화를 혼자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신촌의 수많은 인파를 빠져 나오며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내 눈에 다양한 사람들이 보이고, 내 귀에 각기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확인하고 내심 안도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언젠간 나도 마이클처럼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언젠가 일시적으로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는 철저히 남성의 관점에서 만들어졌다. 감독은 남자이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모두 드러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오늘을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관점이기도 하다. 누구든 수많은 인파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을 느껴본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깊은 우울함과 외로움을 동반한다. 하지만 남들이 다 똑같다고 단정하여 타인의 개성을 지워버리고 무관심으로 덮어버리는 것은 이 영화 같은 결과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아노말리사는 권태로움으로 짓눌린 세상에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영상미도, 오락성도 아무것도 없는 영화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봐야하는 영화이다.
 
 
[박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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