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선선한 밤이면 생각나는 그 구절 [문학]

글 입력 2016.03.30 18:33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날씨가 많이 풀리고 저녁 바람이 선선해졌다.

너무 춥거나 너무 덥지 않은 선선한 저녁이 오면 기분이 이상해지곤 한다.
옛날 추억들도 떠오르고 ‘작년 이맘때쯤은 어디서 무얼 했더라..’하는 생각도 난다.
그리고 본가에 있는 가족들도 생각난다.
이럴 때는 친구들에게 연락해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싶지만 문득 혼자 있고 싶어져 단념하기도 한다. 
 
또 이럴 때 가끔 생각나는 소설이 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다.

많은 문학작품들 중에서도 교과서에서나 배웠던 <메밀꽃 필 무렵>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웃기기는 하다. 
하지만 선선한 여름 밤 쏟아지는 달빛 아래를 걸으며 이야기하는 그 느낌을 우리의 말로 가장 잘 살린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예전에 집에서 시간을 때우다 책장에서 한국단편소설모음집 같은 것을 집어 들었다. 심심하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책을 읽고 싶지는 않아 단편집이나 그냥 펼쳐본 것이었다. 그때 <메밀꽃 필 무렵>을 읽게 되었고 아직도 내 뇌리에 박혀 선선한 밤이면 생각나곤 한다. 
 


“달밤이었으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지금 생각해두 도무지 알 수 없어.”

허생원은 오늘 밤도 또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는 것이다. 조선달은 친구가 된 이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렇다고 싫증은 낼 수도 없었으나 허생원은 시치미를 떼고 되풀이할 대로는 되풀이하고야 말았다.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조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흔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 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공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 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이 부분이 지금까지도 가끔씩 내게 떠오르는 장면이다. 

장돌뱅이 허생원과 조선달, 동이가 나귀를 타고 다음 장이 열리는 곳으로 산길을 따라 이동하는데, 
조용한 와중에 달빛은 흐드러져 메밀꽃 밭을 환하게 비추고,
허생원은 딱 한번 메밀꽃이 하얗게 폈던 달밤에 처녀와 정을 나눈 이야기를 언제나 그렇듯이 또 시작한다.
저 뒤의 동이에게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그도 그런대로 적적하지 않은 기분이다. 

후에 허생원은 동이의 어머니 이야기를 듣고, 그녀가 바로 자신과 정을 나누었던 그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있는 제천 장으로 가자 말하고는 동이가 자신과 똑같이 왼손잡이 인 것도 보게 된다.  

딱 하룻밤 물방앗간에서 정을 나눈 채 도망가버린 남자와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해 동네 사람들에게 쫓겨난 여자, 그리고 의붓아버지 밑에서 고생하다 뛰쳐나와 장돌뱅이 생활을 하는 아들.

어쩌면 그리 아름답지 않은 조합의 이야기를 이효석은 서정적으로 표현해냈다.

 
어떤 소설을 읽으면서 풍경에 대한 묘사만으로 감동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 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공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마치 '불후의 명곡'을 보는 우리 아빠처럼 아저씨같은 탄성을 냈다.
국어 시간에 공부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동인데 말이다.

재작년 즈음인가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이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영화관으로 달려갔던 생각이 난다. 단지 <메밀꽃 필 무렵>을 어떻게 표현했을까를 기대하면서 보러 간 것이었다. 영화 자체는 정말 의미 있고 좋았으나 메밀꽃 핀 달밤 장면에서만큼은 적잖게 실망했었다. 그만큼 이효석의 글을 다시 재해석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834574_3.jpg
 

이 글을 쓰며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봉평에서 매년 9월 '평창효석문화제'가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에 가면 소설 속 메밀꽃밭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어떤 곳에서도 그의 글과 같은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없다면 직접 그의 고향으로 찾아가 메밀꽃밭을 내눈으로 직접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모르겠다. 내 눈으로 직접 본 달밤의 메밀꽃밭이 이효석의 언어만큼 아름다울지는.





<메밀꽃 필 무렵> 전문 



이다현.jpg
 

[이다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