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장미의 가시마저 끌어안은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문학]

글 입력 2016.03.15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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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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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매혹적인 제목을 가진 이 책 속에서는 그 이름과는 다르게, 혹은 너무나 어우러지게 끔찍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장서관에서 일어나는 수도승들의 잇따른 의문의 죽음과 그 죽음에 대한 전말의 제시는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제목에 내포된 의미의 향을 더욱 짙게 한다. 다만 나는 그 장미의 향을 코 속 깊숙이 맡지 못했다는 점에서 매우 아쉽다.
상당히 어려웠던 이 책에 대해 내가 감히 무얼 알고 느껴서 감상문을 적겠냐마는 적어도 내가 이 책을 접하면서 긴 독서과정 동안 고민해보았던 것에 대해서 감상을 정리하려고 한다. 더 공부해서 내가 다시 이 책을 접하게 되었을 때는 짙은 그 장미의 향을 내 코 속, 뇌 속 깊숙이 아득하게 맡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흥미로운 중세시대의 이야기를 다룬 책은 그 시대적 배경만으로도 꽤 나의 흥미를 일게 했다. 문학적으로 꼭 공부해보고 싶었던 중세시대의 문화와 역사였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배경에 대한 내 얕은 지식에 실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수도승과 함께 호르헤 수도승의 발악이 담긴 사건의 전말을 알아낼 수 있었던 이유는 추리소설이라는 책의 구성과 파격적인 수도승들의 죽음에 있었을 것이다.
 
내 상상을 간질였던 부분은 크게 세 가지가 있었다. 그 중 첫 번째는 금해진 것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책의 주 내용은 장서관이라는 한 장소에서 맞이하게 되는 수도승들의 연속적인 죽음이다. 자꾸만 사람이 죽어나감에도 불구하고 수도승들은 그 장서관에 들어가 모두가 알고자 했던, 접하고자 했던 금서에 접근하려 한다. 여기서 나타난 이들의 심리는 무엇일까 시체가 하나씩 발견될수록 생각해보았던 것 같다. 왜 이들은 죽음이라는, 암묵적으로 모두가 예상할 법한 결과를 무릅쓰고도 그 곳에 발을 들였을까. 책에 대해 찾아보던 중 중세 수도승들의 앎에 관한 글을 읽었다. 그들이 안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보존이며 진정한 앎이란 그저 무엇인가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알 수 있었던 사실이나 알기 힘든 사실까지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난 이 앎에 대한 추구를 그저 중세 수도승의 지식 추구로 제한하고 싶지 않다. 우리 모두 금해진 무언가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들 이야기 하는 판도라의 상자의 의미와도 같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유래되는 판도라의 상자는 아름다움을 상자에 넣어 전달하면서 가는 길에 절대 열어보면 안 된다.”라고 당부하였는데 그 궁금함과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심에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 삶의 본보기이자 우리가 삶을 살며 모방하는 신화에서도 이야기 하는 제한을 거부하는 인간의 본성을 보아 나는 수도승들의 금서를 향한 집착이 행동의 동기는 모르겠으나-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이 자꾸만 장서관에 들어가려고 했던 이유, 그리고 그 금서를 찾으려 한 이유는 결국 내 딴으로는 그것이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금서였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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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렇게 누군가의 죽음을 불사르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금서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 다음 의문이 된다. 결국 호르헤 수도승이 지켜왔던 금서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장이었다고 한다. 이는 비극을 주로 다룬 1장을 뒤이어 희극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이것이 금서가 되었던 이유는 신을 중시하고 신에 의해 움직여지는 중세시대 때였다는 책의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중세시대 때 희극은 금기시 되는 행위였다. 두려움과 연민을 담아 진중해야하는 비극과 달리 희극은 못난 사람들을 우스꽝스럽게 그려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두려움을 없앤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으며 신을 기만하는 극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희극의 긍정적인 가치를 꾸려 묶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장은 그들에게 있어 금서였을 수밖에 없다. 수업에서 이론적으로 배웠던 중세시대의 희극의 의미를 이렇게 무참한 살인을 저지르면서까지 밝혀지면 안 되는 금서라고 다시 느끼니 우리가 그저 웃고 즐기는 희극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는 계기도 되었다. 신을 믿어서는 아니나, 나 역시도 코믹을 다룬 극을 좋아하지 않는다. 코믹 영화는 극 안에 있는 주인공들의 우스운 하락세(?)나 희생(?)을 통해 억지로 우리에게 재미를 주고 있는 거라고 느낀 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흔히 비극적이라 불리는 마음 아픈 이야기들을 보고, 그것이 해결되었을 때, 또는 슬픈 결말의 직전 그 잠깐의 행복들이 더 희극이라고 느껴질 때도 있다. 꼭 배를 잡고 웃어야만 희극이 아니라는 내 생각으로서는 굳이 신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희극을 저급한 것으로, 금서로 보았다는 그들의 생각에 어느 정도 동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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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도 인상 깊었다. 책을 읽고 내가 작가라면 어떻게 제목을 지었을까, 생각해보았는데 결코 장미의 이름은 연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미이면 장미였지 장미의 이름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에서 관심이 갔다. 책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인터넷 블로그에서 영화 리뷰를 보면서 누군가가 쓴 제목의 의미를 읽었다. 그 글쓴이는 제목의 장미가 극 중의 장서관을 의미하는 것일거라고 말했다. 장미는 예쁘고 향기로우나 가시가 있다. 그렇기에 여러 수도승들이 그 매혹적인 유혹에 끌리지만 가시, 즉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을 보니 의미가 비슷하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해석이지만 이름의 의미도 궁금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는데, 아마 그 장미는 금서인 희극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싶다. 그 금서를 찾아가는 이야기이니 제목이 <장미의 이름>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장미의 이름은 바로 희극이었던 것이다. 일차원적 이기는하지만 만약 나의 해석이 얼추 작가의 의도에 비슷하게 다가갔다면 나는 이 제목이 탄생이 무척 궁금할 것 같다. 아까 말했듯 내가 작가였다면 나는 이런 제목을 짓지 못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야기 밖으로 나와 관계없는 다른 사물의 속성을 빗대어 표현하면서 이름이라는 단어로 이야기 속의 금서의 존재와 그를 가지기 위한 험난한 상황까지 표현해내었으므로 제목 하나에 이 긴 장편소설 전부를 담아낸 것이 정말 멋있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장미의 이름은 무엇일까. 나는 그 갖기 힘든 무얼 갈망하고 있을까. 죽음을 맞서서라도 내가 가지고 싶은 건 무얼까. 나는 아직 내 장미의 이름을 모른다. 내게도 가시마저 끌어안고 싶은 장미가 생긴다면 이 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흥미진진했다. 금서를 찾는 수도승의 역할도 되어보고 이를 처치하는 호르헤 수도승에게 이입 해보기도 하며 내가 겪어보지 않은 그 당시의 시대와 그 생활들에 대해 부족하지만 경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만 내가 이를 완벽히 이해하지 않았으리라 확신하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면 다시한번 읽어보고 싶다.
[김지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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