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너는 영원해/ 연극 < 우주의 물방울 > [시각예술]

글 입력 2016.03.15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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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물방울.jpg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보았던 연극 <우주의 물방울>. 거리를 다니면서 연극 포스터들을 여럿 접하지만 이목을 확 끄는 포스터는 사실상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몇 안되었는데, <우주의 물방울> 포스터가 눈에 확 들어왔다. 사실 뭔가 자극적이게 표현된 것도 아니고 원색을 사용해서 눈에 띄게 그려진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이목이 집중되었는지 모르겠다. 이것도 나름의 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나에게는 굉장히 벅차게 와닿는 작품이었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을 밝히며 후기를 작성하겠다.




공연장에 들어서서 처음에 좀 당황했다. 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데 그 앞에 일렬로 캐비닛이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대 뒤편의 윗쪽, 객석을 기준으로 무대 앞편의 오른쪽 바닥에 환풍기가 빛을 받고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무대가 시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순간, 갑자기 무대 쪽에서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아주 천천히, 걸어나와 무대 구석구석 그리고 캐비닛 사이사이를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마음 놓고 있던 찰나에 어두운 가운데서 사람이 움직여서 놀랐는데, 그들은 어두운 공간 속을 부유하면서 마치 우주 속의 별처럼, 그리고 제목에서 가리키는 것처럼 우주의 물방울처럼 존재했다. 무대가 시작할 시간이 되자, 그들은 무대의 가장 앞쪽에 일렬로 정렬되어 있던 캐비닛들을 이리저리 옮기고, 그 캐비닛을 열어 그 안에 있던 배우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작품이 시작되었다.



내용을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다. 과거 연극배우였던 고일봉은 현재 아들을 잃고 병든 아내 화수를 수발하며 살고 있다. 변두리 지역 룸살롱 반주자로 일하는 그는 성실하게 아내를 보살피지만 사실 그 자신 조차도 몸이 좋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일봉은 꿋꿋이 긍정적인 모습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 친구 만수와 친구의 아들 병만이에게서 누에를 받았던 일봉은 누에 두 마리를 키우며 병든 아내와 함께 누에를 바라보며 자신들을 투영시킨다. 날지 못할 걸 알면서도 날개를 만드는, 자신의 몸을 축내며 실을 짓는 누에의 모습을 보며.



이 작품은 시놉시스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결국 '사랑'을 이야기한다. "삶은 그것이 왜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할 만큼 쉽지 않은 사태의 연속이다"라는 시놉시스의 첫 문장은 정말 가슴 아프게 슬픈 진실이다. 이렇게 '주어져 버린' 인생에서, 이 작품은 그러한 삶을 살아나갈 원동력이 사랑이고, 그 사랑은 맹목적인 것이라 말하고 있다. 실로 그러한 내용이었다. 배우로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을 일봉, 그가 자신도 몸이 힘들면서 투병 중인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보듬었던 것은 결국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맹목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장의 일자리가 사라져도, 겨우 버티던 단칸방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어도 살아나가야 하는 이유는 일봉이 화수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쓰레기로 몸 뉘일 틈조차 여의치 않아 보이는 그 방에서 아내를 항상 보살폈고, 아내 화수가 죽은 후에는 자신도 명이 다한 것을 예감하여 집을 깨끗이 치우고 아내를 만나러 갈 준비를 미리 했을 것이다. 일봉과 화수가 죽은 뒤 그 집에 들어온 새로운 세입자 부부의 입을 통해서 나타난 '실상'은 일봉과 화수가 살아온 삶의 전 과정의 모순과 고난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살아오고 견뎌낼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재확인시킨다. 바로 사랑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극 중에서 일봉은 실제 나이처럼 지긋이 나이든 모습(승의열 배우)으로 분했지만 화수는 젊은 여성(한소정 배우)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비록 관객들이 연극을 감상하는 시점은 전지적 시점이지만, 본질적으로 이 극은 말미에 세입자 신혼부부가 나타나 실상을 드러내는 그 장면 이전까지 일봉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 화수는, 일봉이 "우리 이쁜이"라고 부르는 그 예쁜 모습으로 관객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일봉에게 화수의 모습은 나이가 들어도, 병이 들어도 항상 그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비단 남녀간의 사랑만을 그리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극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 일봉에게는 아내 화수가 있고, 일봉의 친구 만수에게는 아들 병만이 있다. 그러나 유일하게 일봉과 함께 룸살롱에서 일하는 미스홍은 사랑하는 대상이 없는데, 그녀는 결국 자신의 손으로 삶을 마감하는 선택을 내린다. 이 작품은 어떠한 형태로든, 삶을 움직이고 버티게 하고 위기를 뛰어넘는 힘을 발휘하게 하는 원동력이 사랑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에 더하여, <우주의 물방울>은 그 이상의 의미를 이끌어내려는 모습을 보였다. 누에는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실을 짓고, 날지 못하고 입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변태한다. 이로써 누에는 유한한 삶을 마감하게 되지만 그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의 의미는 무한한 것이다. 마치 일봉과 화수의 삶이 유한했지만, 그들의 삶과 사랑이 무한하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되는 것과 같다. 비록 개개인은 우주의 물방울처럼 아주 미미한 존재지만 그것은 이전에도 존재해왔고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유한한 생명을 품고 있지만 개인은 생명이 다하더라도 이 땅에 존재했다는 것을 남길 수 있고 그로부터 무한한 가치를 발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아름답고 고결한 것이지만 마냥 그렇기만 한 것도 아니다. 사랑은 질척일 수 있고 또 아주 모난 형상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사랑의 여러 단면들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희생하는 것, 고결한 것을 그리면서도 맹목적이고 누군가(신혼부부 중 아내)에게는 무섭다고 느껴질수도 있는 어떤 것.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드러난 사랑을 한 단어로 묘사할 수는 없지만, 값싼 사랑을 그리지 않고 그 이상의 함의를 담아냈다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은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연출이 굉장히 세련되었다. 극의 완급을 조절하느라 중간에 일봉과 만수의 대화 씬에서 웃음이 나오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그 때 아들 병만이가 나와서 그 장면들에 마치 양념을 치는 듯 재미를 극대화하는 모습들은 아주 재미있었다. 게다가 무대가 시작되기 전부터 있었던 캐비닛들을 활용해서, 그것이 문이 되기도 하고, 캐비닛을 통해 장면 속에 새로운 장면을 삽입시키기도 하고 또 말미에 이르러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어떤 것이 되는 그 모든 연출은 정말 세련되었다는 말 외에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배경음악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극을 연출한 것 역시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연극들에서 배경음악을 사용할 때 몰입이 깨지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진중한 연극에서 배경음악을 사용하면 종종 극의 장면과 배경음악이 따로 노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있어서 연극에서 배경음악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물론 효과적으로 극의 내용을 전달하는 경우도 있으니 항상 반대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적막한 가운데 극이 전달되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 고요함이 있었기 때문에 배우들의 비언어적인 요소들 하나하나에 관객들이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브루크너 9번이 마지막에 이르러 적막 속에서 극적인 종결을 맞이하기 때문에 적막 그 자체가 작품의 일부나 다름없듯이, 사위가 잦아든 그 고요한 적막이 이 작품의 매력을 극대화시킨다고 느꼈다.





<우주의 물방울>은 극적인 장치들이 매우 풍부한 작품이어서 한 번만 보고 이해하기에는 힘들 수도 있다. 극단 피오르가 형이상학적 연극예술을 추구한다고 소개되어 있던데, 정말로 형이상학적인 내용과 상징들이 풍부한 작품이기 때문에 집중해서 살펴보지 않는다면 놓쳐버리는 것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꼭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특히 지금같은 현실에 이 작품은 정말 많은 것을 한꺼번에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극단 피오르가 어떤 작품을 또 무대에 올릴지 손꼽아 기다리게 될 것 같다.


또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는 대학로예술극장에서 무대를 관람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굉장히 좋은 것 같다. 대부분의 소극장들은 열악한 환경에 있기 때문에 무대가 좁아서 연출에 한계가 있다. 그런데 대학로예술극장은 소극장임에도 무대가 아주 시원시원하게 트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극단 피오르가 원했던 그 연출을 무대가 모두 소화할 수 있었다. 사색하게 만드는 진중한 작품들이 더 많이 지원받아서, 대학로예술극장(처럼 연출에 한계가 적은 무대)에서 관객들과 많이 소통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석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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