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것은 역사가 아닙니다, < 달빛 안갯길 > 리뷰

글 입력 2016.02.10 22:0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연극 <달빛 안갯길> 리뷰



# 선묘의 이야기 -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 이름은 선묘에요. 얼마 전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한 사람을 만났어요. 그 분의 이름은 ‘의상’, 불가에 몸을 담고 계신 분이세요. 당나라로 유학을 가는 길에 잠시 저희 집에 머물게 되셨는데, 처음 보는 순간부터 눈을 뗄 수 없었어요. 외모 때문만은 아니에요. 다른 사람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저 반듯함, 수행을 향한 열정, 하나부터 열까지 존경스럽기 그지 없는 분이셨죠.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어요. 


처음엔 그저 대사님을 존경하는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단순히 존경하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대사님을 생각할 때마다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지, 그 분 앞에만 서면 돌처럼 굳어버린다니까요. ‘식사 맛있게 하셨나요?’ 오늘 이 한 마디 하려고 어제 자기 전에 수십 번은 연습했는데, 결국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한 거 있죠.
그런데 큰일이에요. 이제 곧 그분이 떠나신대요. 언제 돌아올지, 일년이 될지 십년이 될지 그분도 모르신대요. 전 그분 없이는 안될 것 같은데, 어떡하죠? 떠나시기 전에 한번 잡기라도 해볼까요? 그분은 제게 눈길 한 번 주신 적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

어떻게 되었냐고요? 어떻게 됐긴요… 정말 정중하게, 거절하셨죠. 여자가 아니라 제자로 생각하고 그 마음만 고맙게 받으시겠대요. 마음은 너무 아프지만, 그분께 피해를 주고 싶진 않아요. 대신 부탁 하나 했어요. 언제가 되었든, 돌아오시는 길에 꼭 다시 한번 우리 집에 들러주시길, 그래서 다시 한번 만날 수 있길. 그때까지 전 그분을 위해 옷 한 벌 지으며 기다릴 거에요.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에요. 약속하셨거든요.

...

대사님이 먼 길을 떠나신지 어느덧 10년, 오늘은 아침부터 유난히 날이 흐리네요. 아무래도 비가 많이 오려나 봐요.

...

10년, 자그마치 10년이라구요. 매일 그분을 생각하면서 하루를 일년같이 보냈는데, 얼굴도 못 보고 가시다니요. 날씨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서 비가 쏟아지기 전에 잠시 집 앞 시장에 다녀왔을 뿐인데, 그 사이에 왔다 가셨다고요? 말도 안돼… 부처님, 도와주세요. 대사님 드리려고 만든 이 법의, 이것만이라도 전해드릴 수 있게, 부두에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게 제발 절 좀 도와주세요.

...

저게 그분이 탄 배래요. 대체 신라에 무슨 일이 생겼길래 이리도 급히 돌아가시는 건지. 그분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면 전 이제 더 이상 이 곳 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이제 바보처럼 기다리고만 있지 않을 거에요. 하늘이시여,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사람의 몸으로는 이 절벽에서 저분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어요. 용이 되게 해주세요. 그래서 우리 대사님 신라에 무사히 도착하실 수 있게, 또 그곳에서 평생 바라신 대로 사찰을 짓고 수행을 이어가실 수 있게, 용이 되어서 그분 곁을 지킬 수 있게 해주세요.


의상은 보았을까
절벽 끝에서 떨어지는 꽃 한 송이를. 
바다에서 솟구친 한 마리 용은
하늘로 승천하지도 않고
성난 파도를 다독이며 
망망대해를 건넜다네.


전설에 따르면, 그렇게 용이 된 선묘는 의상대사가 무사히 신라에 도착해 부석사가 완공될 때까지 대사를 지킨 후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묻혔다고 한다. 부석사라는 이름도, 바위를 공중에 띄워 사찰 건설을 반대한 사람들을 내쫓았다는 일화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선묘 낭자 설화는 1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는 부석사 건립 설화이다. 




# 잠에서 깨어난 선묘 - 이것은 전설이 아닙니다. 



 “깡! 깡! 깡!”


1000년의 시간이 지난 부석사, 무량수전 밑을 파헤치는 소리가 요동친다. 옛 이야기로만 전해 내려오던 ‘석룡(石龍)’이 무량수전 앞 뜰에서 발견된다. 잠들어있던 선묘가 깨어난다. 그러나 이제 부석사엔 더 이상 의상 대사가 없다. 평화로운 사찰은 늑대 소굴이 되었다. 일제로부터 강제 파혼 당한 후 비밀스럽게 망명을 떠나려는 비운의 조선 왕족 민갑완, 그녀를 감시하는 일제의 앞잡이들, 한 민족의 역사를 제 입맛대로 재구성하려는 일본인 역사학자 쓰다 소키치, 그리고 그것이 현대적 역사연구라고 믿고 자부하는 조선인 엘리트 이선규가 있다. 전설이라는 것이 역사에서 변두리 위치로 취급 받는 것처럼, 선묘는 이 모든 사람들과 완전히 동 떨어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선묘에겐 왜인지 민갑완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사랑하던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선묘는 마침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는다. 이 때 모든 것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역사란 무엇입니까!”

‘실증’, 그것이 역사 연구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자부하던 젊은 조선인 이선규,
그는 혼란에 휩싸인 채 그의 스승에게 외친다. 


“다 끝나버렸어요.”

망명 계획이 발각되고 일제에 의해 모든 길이 가로막히자 
민갑완은 모든 것이 끝났다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제가 지켜드릴께요"

혼란과 절망의 중심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선묘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는다. 
신라로 떠나는 의상대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 몸 던진 것처럼, 
이제 민갑완을 위해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한다. 




#歷史, 이것은 역사가 아닙니다



연극 <달빛 안갯길>은 일제 시대 비극적 역사와 신라시대 설화라는, 전혀 다른 시간대의 두 역사를 결합해 독특하고 흥미 진진한 스토리를 선보인다. 그리고 그를 통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년 동안 역사를 배워왔지만 나는 그 질문에 대해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내가 할 일은 교과서와 역사책에 쓰여진 것만을 착하게 꼭꼭 씹어 암기하는 것뿐이었으니까.  

극중 이선규의 말처럼, 곰이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고조선 건국신화는 허무 맹랑한 설화가 아닐 수도 있다. 곰을 숭배하는 부족과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간 세력다툼 끝에 곰을 숭배하는 부족이 이긴 것이라는 숨은 해석의 여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선묘 낭자 설화도 한낱 러브 스토리에 지나지는 않을 것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누구도 역사에 대한 완벽한 정의 내릴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역사에 대한 학문적 정의를 내리는 것만큼 역사가 가지는 힘을 ‘실감’하는지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역사歷史, 한자를 풀이하면 지난 기록이라는 뜻인데, 그것은 단순히 지난 기록이 아니다. 진부한 말이지만, 역사는 한 나라의 정체성이자 앞을 내다 볼 수 있는 나침반 같은 것이다.

일제는 조선의 역사를 제 입맛대로 바꾸기 위해 ‘조선사편수회’라는 역사 기관을 발족시켰다. 그들처럼 역사의 힘을 아는 자들은 분주하고 은밀하게 움직인다. 지금 이 땅 어디에선가도 다시금 역사의 힘을 이용하려는 늑대들이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언젠가 이 나라의 뿌리를 이루는 역사들이 한낱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역사 뿐만 아니라 오늘을 돌아보게 만드는 연극이었으며 또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봤으면 하는 연극이었다. 안개가 자욱히 낀 시대를 슬며시 비추는 한 줄기 달빛, 연극 <달빛 안갯길>이다.  


004120f02a6a6dc057550c99626d060a_8fBu7cxmnIuxWv7mjyAVu.jpg


[윤정훈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