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저녁편지6] 청혼 1

글 - 최정란
글 입력 2016.03.29 17:0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시인의 저녁편지6

청혼 1

글 - 최 정 란


photo-1432105344056-6c8fc3286af3.jpg
 

우리 심심한데 결혼이나 할까? 능란한 개그맨이 순도 높은 농담을 던지듯 정색한 얼굴로 철 지난 유행어가 날아옵니다. 결혼? 어이없습니다. 노노노노노. 나는 집게손가락 하나를 세워 입술에 대고 가볍게 흔듭니다. 그의 청혼이 농담이니 나의 거절도 농담일 수밖에요.  우심깜뽀하? 우심결하?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냉소는 아니고 실소랄까요.

굳이 그를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누가 한 청혼이라도 거절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혼 그 자체를 거절합니다. 심심하지도 않을 뿐더러, 심심할 여유조차 없습니다. 누구와도 결혼할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결혼이라는 제도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고, 졸업하면 이 땅을 떠날 예정이지요. 아무에게도 아무 것에도 미련이 남지 않아야 합니다. 

스물 셋, 누구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 청춘이 캄캄합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갑갑하고 숨찬 시간은 졸업과 함께 끝나야 합니다. 결혼뿐만 아니라 어떤 제도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사양입니다. 그와 함께 물 밖 세상을 떠돌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내가 꿈꾸는 세상은 상상 속에서조차 그와 어떤 가느다란 끈으로도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답게 여자들에게 자주 반합니다. 어느 날 그가 여자를 만나러 가는 부산여행 길에 동행합니다. 바다! 좋아요. 같이 가요. 기차 안으로 청춘의 파도가 넘실댑니다. 그를 대신해서 내가 여자의 집으로 전화했을 때 여자의 어머니가 말합니다. 사상 갔어요.

사상이 얼마나 먼 곳인지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으나, 흰 바지를 입은 긴 머리의 여자를 보면 사상이 떠오릅니다. 사상과 사랑이 얼마나 가까운 관계인지, 어떤 사상이 사랑을 어떻게 끌어들이는지, 어떤 사상이 사람을 기다리게 하고 만나게 하고 헤어지게 하는지, 궁금해집니다.

여동생이에요. 한 나절을 기다려 만난 긴 머리에게 그가 나를 소개합니다. 셋이서 해운대 미포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탑니다. 파도치는 뱃전에서 긴 머리의 어깨를 감싸고 입술이 닿을 듯 얼굴을 당긴 자세로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는 그의 옆얼굴을 멀찍이 바라보는 나는 영원히 그의 여동생입니다.

스터디그룹에서 우리는 자주 그의 첫사랑 이야기를 듣습니다. 십대 후반의 그의 몸과 영혼을 사로잡았던 아름답고 명민한 소녀, 딸을 낳으면 그 이름을 붙여주고 싶은 작고 호리호리한 소녀가 그의 첫사랑입니다. 

그와 같이 이십대 후반이 되었을 첫사랑 이야기를 할 때면 그의 얼굴이 환하게 일그러집니다. 그 순간 그의 모순적인 얼굴은 기이하게 아름답습니다. 열정의 아우라가 그를 감쌉니다. 마치 현실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한 번도 지나간 과거였던 적 없는 첫사랑을 도드라지는 훈장처럼 가슴에 주렁주렁 매단 그에게 질투심을 느끼기는 하지만, 청혼이라니요. 그것도 농담의 형식으로. 모욕감까지는 아니지만 약간의 수치심을 느껴도 되는 것 아닐까요. 농담은 농담입니다. 한참을 웃다 못해 눈물까지 질금거리며 덧붙입니다. 

형, 무슨 농담을 그렇게 진지하게 해요? 그러니 울고 싶잖아요. 우리가 서로 빚진 사이인가요? 평생 서로에게 시간과 공간을 갚으며 살아야 할 만큼. ( to be C )




최정란 (시인)

2003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여우장갑], [입술거울]




ART insight

Art, Culture, Education - NEWS


[김민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