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저녁편지4] 첫사랑

당신에게는 첫눈이 오는 날 만나자던 약속이 있었나요?
글 입력 2016.01.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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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저녁편지 4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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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loaded by Paul Mood)

글 - 최 정 란


어떤 말은 한 마디 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약속을 떠올리게 하고, 철없는 어린 연인들을 약속 없이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열 일 젖혀두고 달려가게 합니다. 메마른 추위를 잠시나마 촉촉한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세상의 검은 어둠을 덮어주는 흰빛을 불러옵니다. 첫 눈.

남쪽 바다, 이 도시에는 아직 첫눈이 오지 않았습니다. 해가 바뀌고 겨울이 다 지나가는데. 그 흰 것이 주는 짧은 위안은 이 남쪽 항구를 비켜가려는 걸까요. 첫눈 한 번 없이 겨울을, 바람을, 추위를 견디는 나무들이 안쓰럽고 애틋합니다. 

이 겨울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의 목록에 첫눈을 추가합니다.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 서둘러 다른 도시를 향해 달려가던 연말의 어느 날 저녁, 운전대를 잡고 도시의 경계를 막 넘어가던 순간, 잠시 차창 밖으로 희끗희끗 날리던 그 애매모호한 입자가 첫눈일 리 없습니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어제 저녁 첫눈을 보았느냐고. 일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왔을 때, 어느 곳에도 눈의 흔적조차 없었는데.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첫눈이 다녀가다니요. 내 집 창문 앞에, 내가 걷는 골목에, 내가 바라보는 나무에, 내가 잠시 비운 사이에 다녀가다니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첫사랑도 그랬을까요. 그 때 내게 다녀간 그것이 첫사랑이었을까요. 희끗희끗 날리는 하얗고 차가운 입자, 물기가 더 많아서 비 같기도 하고, 바삭거려 싸락눈 같기도 하던, 그 애매모호한 기호들이 하늘에 날리던 그 짧은 순간이 첫사랑이었을까요. 소녀와 청년의 경계를 빠르게 넘어가고 있었지요

세상의 하늘은 잿빛이었고 나날이 더 어두워졌지요. 캄캄하고 매운 하늘은 숨쉬기조차 어려웠어요. 봉오리째 떨어져 내리던 벚꽃들과 제 살을 물어뜯는 소문들과 비명 섞인 구호들이 첫눈이 아니듯, 간헐적으로 쏟아지던 뜨거운 눈빛이 첫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도서관에 앉은 내 차가운 이마 앞에 불쑥 내밀던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이 첫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시간의 길 위를 빠르게 달리던 운전대를 놓고 멈춰 서서 그 모호하고 애매한 신호를 첫사랑이라 믿어야 했을까요. 그것을 첫사랑이라 믿었다면, 오랜 후에 문득 멈춰 서서 그때 그것이 첫사랑이었을까,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아도 되었을까요.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고개를 가로로 세게 내젓다가,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 고개를 위아래로 자신 없이 끄덕이지 않아도 되었을까요. 

눈앞이 캄캄해지고 발이 떨려 주저앉아야 했던 그 빛나는 이마가 첫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스쳤을 뿐인데 두근거려서 숨이 막히던 그 까칠한 뒷모습이 첫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어느 순간 하늘로 솟구치다가 다음 순간 땅속으로 곤두박질치던 심장의 두근거림이 첫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 앞에 서면 말이 꼬이고 나도 모르게 저지르던 바보 같은 행동도 첫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저 별을 볼지도 몰라, 자다 깨어나 젖은 마음을 뭉쳐 닦던 밤하늘 별도 첫사랑은 아니라 생각했어요. 

왜 그렇게 첫사랑이라 인정하기 어려웠을까요. 책으로 배운 사랑은 이런 게 아니어서 일까요. 어둠 속에서 어깨가 젖는 것이 두려웠을까요. 나날이 더 어두워지는 하늘을 못 본 척, 사랑에 기대기에는 메마른 자존심이 더 컸을까요. 사랑의 불가능을 미리 알아버린 조숙함 때문이었을까요.

첫눈이 늘 흐뭇한 폭설일 리 없듯, 첫사랑도 달랠 수 없는 갈증처럼 짧게 다녀갈 수 있는 애매모호한 기호일 수도 있는데, 첫눈이 어둡고 흐린 날 잠시 다녀가는 것처럼, 첫사랑도 가장 어둡고 흐린 날 찾아올 수 있는 것인데, 차갑고 거친 삶의 어두운 저녁에 지레 주눅 들고 겁먹어서 첫사랑이 올 것이라는 기대조차 없이, 삶의 초저녁부터 미리 암막커튼을 두껍게 닫아걸었던가요. 

죽기 전에 한번은 꼭 만나보고 싶은 그리운 첫사랑 따위 없이도 한 생을 살아가는데 아무 지장 없는 척 하며, 이 메마른 지상의 겨울을 보내도 되는 걸까요. 다행이야. 눈 온 뒷날의 빙판 없이도 차갑고 미끄러운 생의 앞부분을 무사히 건넜으니. 스스로를 속이며, 이마에 내려앉아 잠든 영혼을 깨우는 차가운 첫눈 한 잎 없이 서둘러 이 위태로운 생을 안심해도 되는 걸까요. 아니면 다 늦게, 봄에 오는 서설이라도 기다려야 할까요.  

당신에게는 첫눈이 오는 날 만나자던 약속이 있었나요? 약속 없이도 첫눈이 오면 세상 끝까지 뛰어가 꼭 만나야 할 것 같은 첫사랑이 있었나요? 기꺼이 그 뒷날의 위태롭고 미끄러운 빙판과 질척거림을 감수하고 싶었던 빛나는 첫사랑이. (the E)




최정란 (시인)

2003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여우장갑], [입술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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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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