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하퍼리건_그녀의 삶을 통해 내 삶을 진단하다.

스스로를 괜찮다고 속이고 있지는 않은가?
글 입력 2016.01.02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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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삶이 
갑자기 난폭한 해일처럼 덮쳐오던 밤,
하퍼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길을 나섰다.

우리는 과연 정말 괜찮은 걸까?
스스로를 괜찮다고 속이고 있지는 않은가?

연극[하퍼 리건]은 평범한 우리의 삶이 놓치고 있는 순간들을
볼록렌즈 처럼 확대해서 보여준다.
모두가 비슷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인간의 약점을 정확하게 
우리 앞에 드러내준다. 
객석에 앉은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리고 존재하기에 
끊임없이 느끼는 답답함이나 외로움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연극<하퍼리건>은 이맘때 보기 참 좋은 연극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항상 연말은 자기 진단 시간이다. 항상 연말이 되면 올해 내가 이룬 것은 무엇일까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등으로 후회와 고민이 끊임 없이 교차한다. 이런 시기에 자신의 자아를 찾는다는 내용의 <하퍼리건>을 통해서 담담한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하퍼리건포스터저용량.jpg
 

 연극의 주인공 하퍼리건은 지극히 평범한 40대 여인이다. 적당히 화목해보이는 가족을 꾸리고 있고 남편과의 사이도 그다지 나쁘지 않으며 사춘기인 딸과는 사소한 갈등이 있지만 그럭저럭 지내는 정말 흔하디 흔한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갑자기 그녀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며 그녀의 평범했던 일상에 변화가 찾아 온다.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채 아버지를 만나기위해 고향을 찾게 되고, 그 여정에서 그녀가 일상에서라면 절대 마주치지 않았을 법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낯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그녀는 자기 자신의 감춰져있던 면을 발견하며 자신을 새로이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여정을 마치고 다시 자신의 가정으로 돌아온 하퍼는 자신의 마음 깊숙이 있던 의심을 직면한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 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임을 암시하며 연극은 막을 내린다.
 
 이야기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여정이다. 하퍼는 한 때 자신에게 익숙했던 고향이란 공간에 방문하여 다양한 낯선 관계들을 맺게 된다. 어찌보면 쉬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흔히 고향하면 연상되는 느낌은 익숙하고 안정되고 포근한 느낌이다. 그러나 하퍼에게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고향은 포근한 느낌이 아닌 낯선 공간이었다. 극의 초반부에서 하퍼는 자신이 사는 곳에서도 익숙하고 안정된 모습이 아니다. 즉 하퍼는 집과 고향 그 어느 곳에도 완전히 속해 있지 못하는 불안정한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생활 공간과는 달리 고향이란 공간은 어떠한 역할에도 그녀를 속박시키지 않기 때문에 그 여정에서 그녀는 자신을 새로이 볼 수 있게 된다. 고향에서 하퍼의 여정은 일탈적이다. 그녀는 술집에서 만난 남자와 시비가 붙자 그의 머리를 맥주병으로 내리친다. 그리고 그의 가죽 자켓을 입고 시내를 활보한다. 예상치 못한 자신의 행동에 당황한 그녀는 인터넷의 만남 중개 사이트에서 만난 낯선 남자와 호텔에서 섹스를 한다. 평소의 하퍼라면 결코 상상조차 못할 일들을 연이어 저지른다. 고향에서의 하퍼는 일련의 일탈 행동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뒤에 그녀는 오랫동안 증오하던 어머니를 만나고 그간 오해가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지금 껏 어머니가 자신의 남편을 미워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어머니를 싫어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남편을 싫어한 것은 자신이 아닌 아버지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퍼와 어머니가 대화하는 과정에서 하퍼 가족의 치부가 드러난다. 하퍼는 지금껏 부정해 왔던 가족의 치부를 다시금 떠올리며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그동안은 부정했던 가족의 추한 면을 딸에게 솔직히 털어 놓는다. 어머니가 그녀에게 말해주기 전에 하퍼도 이미 가족의 치부를 남편의 잘못을 알고 잇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껏 그녀는 이것을 수용할 용기가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지어낸 헛소리라고 외면해 왔다. 그러나 여정에서 새로운 관계를 통해 자신을 마주할 용기를 얻게 된 그녀는 가족의 추한 면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퍼리건 무대.png
 

 <하퍼리건>의 흥미로운 부분은 내용적 측면 뿐 이니라 형식적 측면에서도 거리감을 핵심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연극이 시작하기 전에 무대를 두꺼운 막으로 가려 놓지 않고 준비하는 과정 전체를 관객에게 노출시킨다. 연극 내내 전체적으로 어두운 조명을 사용하지만 완전히 깜깜하게 만들지 않는다. 막이 바뀌어 소품을 옮기는 과정도 관객이 볼 수 있도록 한다. 또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소품을 최대한 간소화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연극에 의자나 침대가 나오면 실제 의자 혹은 침대를 배치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하퍼리건>에서는 이를 최대한 간소화하여 큰 직육면체로 대신한다. 하퍼가 여정에서 각 인물을 만나는 에피소드 또한 자연스럽게 인과적으로 이어지지 않고 개별적 독립적 에피소드로 표현된다. 이런 방식의 채용을 통해서 이 연극은 극적 환상을 거부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연극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현실과는 다른 것임을 구분짓는다. 보통 관객을 극적 상황에 몰입하게 하고 공감하게 하려는 것과 달리 이 연극은 무대 위의 상황을 관객이 비판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한다. 
 

하퍼리건 아침 식사.png

 
 그러나 특이하게도 극의 마지막은 환상적 마치 꿈 같은 분위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극의 마지막 부분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지극히 현실적인 내용에 심지어 이를 더욱 현실에 견주어 보도록 하는 장치까지 둔 연극이 마무리는 환상같이 한다는 대비 구조가 특이했다. 마지막 장면은 하퍼와 남편 딸 세 식구가 모여서 아침 식사를 하는 장면이었다. 극이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였던 것과 달리 조명은 굉장히 밝고 환했다. 또한 아침식사 테이블은 오렌지 쥬스, 신선한 과일, 버터, 빵등으로 풍부하게 꾸며져 있었다. 연극 전체에서 소품이 가장 구체적으로 등장한 유일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은 이상적이고 행복한 미래에 대해서 말한다. 밝은 분위기에 행복한 대사로 넘치는 장면이지만 오히려 극적 상황과는 대비되게 쓸쓸한 느낌이 든다. 이런 행복한 상황을 꿈, 환상 처럼 구성하여 남편이 말하는 그런 행복한 삶은 그저 환상임을 절대로 실현될 수 없는 것임을 역설하는 듯하다. 
 하퍼의 남편이 말하는 그런 이상적인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퍼의 가족은 절망하거나 무너지지도 않을 것이다. 더 이상은 자신의 약점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기는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하퍼는 계속해서 궂은 삶을 살아나갈 것이다.

 <하퍼리건>은 40대의 평범한 여인인 하퍼가 자아를 찾아나가는 이야기이지만 이 연극의 메세지는 40대 여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자이를 찾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생동안 짊어지고 가는 과제이다. 그렇기에 자아 찾기의 실마리를 넌지시 알려주는 이 연극은 다양한 관객층에게 유의미한 메세지를 전한다. 먼저, 자신이 외면하고자 했던 자신의 추한 면, 약점 등을 그대로 인정할 것. 두번 째, 자신의 평소 생활 반경으로 부터 벗어나 볼 것.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 A회사의 부장 등 어떤 역할로 규정되어 있는 자신으로 부터 벗어남으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을 새로이 발견할 수 있다. 이 과정을 통해 발견한 자신의 자아는 긍정적 측면 보다는 부정적 측면이 넘칠 수도 있고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자아를 찾고 인정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인간은 성숙할 수 있다.<하퍼 리건>은 그녀의 삶을 통해서 내 삶을 진단해 볼 수 있는 소중한 틈을 만들어 주었다.


[이윤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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