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밀란 쿤데라의 외침,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에 대하여 [문학]

무거움이 좋은 것이 아니고, 가벼움이 나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글 입력 2015.12.30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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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적으로 말해, 나에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오래도록 지니고 간직하고 싶은 몇몇 문장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영원한 회귀의 신화는 부정의 논법을 통해, 한번 사라지면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인생이란 하나의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그 인생은 아무런 무게도 없고 처음부터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서, 인간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무리 아름답게 살아보려고 해도 그 잔혹과 아름다움이란 것조차도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9쪽)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것을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의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나 묵직함은 진정 끔찍한 것이고, 가벼움은 아름다운 것일까?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버려,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기껏해야 반쯤만 생생하고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다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11쪽)
 
토마스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15쪽)
 
토마스는 생각했다. 한 여자와 정사를 나누는 것과 함께 잔다는 것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거의 상충되는 두 가지 열정이라고.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이 욕망은 수많은 여자에게 적용된다)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22쪽)
 
파르메니데스와는 달리 베토벤은 무거움을 뭔가 긍정적인 것이라고 간주했던 것 같다. 진중하게 내린 결정은 운명의 목소리와 결부되었다. 무거움, 필연성 그리고 가치는 내면적으로 연결된 세 개념이다. 필연적인 것만이 진중한 것이고, 묵직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다. (42쪽)
 
그녀를 거울로 이끌었던 것은 허영심이 아니라 거울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는 경이감이었다. (51쪽)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사비나는 작가가 자신의 모든 은밀한 삶, 또한 친구들의 그것까지 까발리는 문학을 경멸했다. 자신의 내밀성을 상실한 자는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라고 사비나는 생각했다. 또한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도 괴물인 것이다. 그래서 사비나는 자신의 사랑을 감춰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진리 속에서> 사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133쪽)
 
그녀는 자기가 참을성이 없었다는 점을 후회했다. 함께 더 오래 있었더라면 그들은 조금씩 그들이 사용했던 단어들을 이해하기 시작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47쪽)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만 있는 것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정을 비교할 수 있도록 두번째, 세번째, 혹은 네번째 인생이 우리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개인의 삶처럼 역사도 마찬가지다. 체코인들에게 역사는 하나뿐이다. 토마스의 인생처럼 그것도 두번째로 수정될 기회도 없이 어느 날 완료될 것이다.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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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 이 네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주인공 격의 토마스는 여자란 ‘나’라는 존재의 부산물 쯤으로 여기며 존재이기보다는 유희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테레사를 만나 테레사에게서 연만과 동정의 감정을 느끼고, 가벼움 쪽에서 무거움 쪽으로 기우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래야만 한다”는 영혼의 울림 아래 그는 테레사를 아내로 받아들이지만 필연과 우연 사이에서 고뇌하며, 특정한 장소, 특정한 시각에 일어난 특정한 사건이 그저 우연이 아닌지, 테레사와의 만남이 그저 우연이 아니었을지 고민한다.

테레사는 무거운 듯 느껴진다. 그녀는 토마스와의 만남을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 믿으며 의미를 부여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토마스와 같은 사람과의 만남을 불우한 어린 시절 속에서 매일 꿈꿔왔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토마스는 시궁창 같은 현실을 벗어나게 해 주는 동아줄 같은 인물이고, 그녀가 가진 단 하나의 것이다.

테레사와는 대척점에서,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는 사비나가 있다. 그녀는 날개짓하는 새처럼 가볍게 둥지를 날아오른다. 구속되지 않고, 구속을 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참을성이 없었다는 점을 후회했다. 함께 더 오래 있었더라면 그들은 조금씩 그들이 사용했던 단어들을 이해하기 시작했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47쪽)에서 보듯, 그녀는 무거움이 두려웠을 뿐 사실은 그것을 원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프란츠는 안정적인 삶 속에서 아내와 무난한 관계를 이어온다. 무거운 존재라 단정적으로 치부할 수는 없지만 가벼움을 상징하는 사비나를 따라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하며 가벼운 존재로 나아간다. 사비나에게 마음을 두었으나 본인도 놀랄 정도로 쉽게 사비나와 멀어지고 다른 이와의 만남을 가질 정도로 가벼운 존재가 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사랑도 있고, 철학도 있고 정치와 역사도 있다. 제목처럼 쿤데라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해 논한다. 그리고 무거움에 대해서도.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영원한 회귀의 신화는 부정의 논법을 통해, 한번 사라지면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인생이란 하나의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그래서 그 인생은 아무런 무게도 없고 처음부터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서, 인간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무리 아름답게 살아보려고 해도 그 잔혹과 아름다움이란 것조차도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9쪽)

쿤데라는 이 니체의 사상과 관련하여 토마스의 입을 빌려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라며 영원성이 무거움이라면 이 일회성은 가벼움이라고 칭했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만 있는 것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필연과 우연을 생각하는 것은 의미 없다. 일어난 일들은 돌이킬 수 없고 그 일이 필연일지라도, 우연일지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후회하고, 돌이켜 생각하고 과거에 의미를 둔다. 과거가 현재의 나를 만들고, 과거의 실패를 돌이켜 현재의 나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거움이 좋은 것이 아니고, 가벼움이 나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또한 개인을 그중 하나로 규정지어서도 안될 것이다. 토마스가 그랬듯, 사비나가, 프란츠가 그랬듯 개인의 생각은 다른 이들을 만나, 다른 사건을 겪으며 변화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적어도 개인에게 자기 자신의 역사와 삶은 무겁다는 것이다. 삶과 죽음은 반복된다. 그러므로, 인류 전체로 보면 매일 죽고 태어나는 생명들 중 하나는 티끌보다 가볍다. 그러나 그 반복이 ‘나’에게 중요한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나’라는 한 개인에게 중요한 것은 반복의 영원함이 아닌 한정된 삶 속에서의 매순간이다. 인류의 역사는 계속되지만 개인의 역사는 죽음으로 영원한 끝을 맺는다. 세상에 ‘나’보다도 무거운 것은 없다. 역사의 반복도, 타인의 존재도 무의미하다. 토마스가 무거운 존재인 테레사를 택한 것도 토마스 자신에게 의미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고, 사비나가 파랑새처럼 자유로운 삶을 택한 것도 과거의 삶에서의 영향과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프란츠의 삶이 변화하는 것도, 자신의 중요하게 생각하는 의미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삶 동안 ‘나’에게 의미를 주는 것들이 의미이고 필연이고 존재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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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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