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서울세계무용축제, 올가 호리즈 무용단 '애완동물'

'애완동물(PETS)'은 우리에 대한 공연이다.
글 입력 2015.10.09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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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세계무용축제, 올가 호리즈 무용단 '애완동물'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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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하고 아름다운 것만이 예술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다. 시와 소설, 미술과 음악 그리고 무용과 행위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예술이 꼭 아름다워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것들은 쉽다. 그리고 편안하다. 그대로 보고 느끼고 감동하면 그만이다. 첫눈에 마음을 사로잡고 울림을 주는 것은 대게 이런 것이다. 하지만 아름답지 못한 것, 되려 추하거나 엉망인것, 난해하거나 낯선 것들은 비교적 느린 속도로 다가온다. 그런 것들은 나로 하여금 더 지켜보게 하고, 많은 시간 사색하게끔 한다. 그리하여 더 오래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본 '애완동물'은 전혀 아름답지지 않았다. 무섭고 낯설었다. 불편하고 불안했다. 더군다나 '애완동물'은 현대무용 공연이다. 예술에 '현대'가 붙으면 불친절하고 난해해지기 마련이고, '애완동물' 역시 그러했다. 명확한 스토리도 설명도 없이 상징적인 요소들로 극을 진행하니 (관찰자의 입장에서) 쉽게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현대무용 공연을 처음 보는 이들은 대게 "작품을 보면서 즐기기보다는 무용수의 움직임을 보며 무슨 의미일까 끊임없이 생각해야해서 부담스러웠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쩌랴.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며 논란을 일으키고 끊임없이 고민하게 하는 것 또한 예술인 것을.

Perfect, I love complicated.  완벽해, 나 복잡한거 좋아해. 영화 <킬유어달링>의 한 장면에서 내게 전율을 주었던 대사이다. (세계 대전 이후 비트 제너레이션을 이끌었던 시인들에 관한 영화인데, 이들은 기존의 문학 양식을 파괴하고 전위적고 해체적인 작품을 썼다. 대표적으로 앨런 긴즈버그, 잭 케루악 그리고 윌리엄 버로우즈가 있다.) 나는 익숙치 않은 것들, 그러니까 지금까지 접해온 그 무엇과도 교집합이 없는 것에 끌리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낯선 것에 과도한 애정을 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맥락에서 '애완동물'은 완벽했다(낯설다는 의미에서 완벽하다는 것이다). 누군가 '그건 이런 것이야'라고 말해주지 않았으므로 내 스스로 질문하고 답해야 했다. 그 과정은 꽤나 번거롭고 복잡하며 불편하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쾌감을 느낀다. 남이 설명해주대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씩 이해해가며 좋아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쉬운 건 재미가 없기도 하다. 다른이가 깔끔하고, 정돈된 말로 설명해버리는 순간 흥미가 반감이 된다. 스스로 상상하고 생각할 여지를 빼앗기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오래도록 보고, 힘들여 생각하고, 나름대로 해석하면서 혼자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런 '불편함'으로 내몰려져 예술이 주는 의미에 복잡해지고 어려워지고 싶다. 가끔은 그런 번거로움이 필요하다. 그들이 던지는 상징과 의미들을 곱씹고 곱씹어 나만의 여운을 만들어내고싶다. 이 모든 것들이 '즐긴다'는 의미에서 효율적이거나 생산적이지는 않으나 그 끝에 굉장한 희열이 기다리고 있다. 말하자면 내 양철 상자 속 장난감 보석처럼 나만이 열어 볼 수 있는, 비밀스럽게 빛나는 진실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이다. 가볍게 즐기는 예술, 공연이나 전시를 꺼린다는 말은 아니다. 오해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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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완동물(PETS)'은 우리에 대한 공연이다. 애정의 존재, 쉽게 길들여지고, 헌신적이고, 온순하면서도 사납고 위험한 (우리). '애완동물'은 우리로 하여금 비가시적인 것들을 관찰하게 만드는 공연이다. 사적인 것은 공적이다. 일상적이고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것. 적막과 고독. 궁지. 공간이 없는 공간. 잔해의 적체. 애정과 대상과 감각의 재활용. 분주함 속에 반복되는 타성. 잡담. 이름 찾기. 독촉과 뜻밖의 사건들. 권력게임. 유혹. 욕망. 지배하는 자와 지배 당하는 자. 기능과 역기능. 의존. 관계와 혼란. 불가능한 친밀함. 강요된 공유의 아이러니. 거짓 프라이버시. 기만. 임의의 것들. 우연인 듯한 놀이. 서로에게 애착을 갖는 남자와 여자. 스스로 길들여진. 야만인. 벽. 상상의 문. 창문이 있는 실내 공간. 빛은 기억일 뿐이다. 도시의 소리는 시간에 의해 차단되었다. 경계 안 공간은 실재하게 된다.



What is this? 다시, 그래서 이게 도대체 뭔데. '애완동물'은 이렇다 할 줄거리가 없다(굳이 말하자면 인간관계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낯설다. 줄거리가 없으니, 관찰자는 길을 잃는다. 어느 방향으로 극을 따라가야하는지 알 길이 없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길이 없으니, 직접 길을 만드는 수 밖에. 쉽게 말하면 알아서 스토리를 만들라는 것이다. 나름의 등장인물을 설정하고, 서사를 구성하고, 무대를 꾸미면 된다. 어렵지 않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로 보여지는 모든 것을 기반으로 상상해보자는 것이니까.

공연장에 들어선 순간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의자, 소파, 선풍기, 종이박스, 수조, 옷가지, 가방, 노끈, 호스, 철사, 비닐이 널브러진 무대이다. 무대 위 소품들은 친숙한 것들이었다. 일상에서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을 물건들이 올려진 무대는 곧 시작 될 공연이 우리네 이야기라는 걸 넌지시 말해주고 있었다. 공연장을 채우던 조명이 꺼지고 다섯 명의 무용수가 등장했다. 시작은 남자에게 안긴 여자, 가만히 서있는 여자, 바닥에 누워 꿈틀거리는 남자, 또 의자에 앉아 쌕쌕거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여자를 한 번에 보여준다. 그 모습이 마치 동물같다. 이내 무대는 무용수들의 격렬하고 거의 파괴적인 움직임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러다가 신음 섞인 울음과 함께 부드러운 춤추기도 하고, 우아하게 노래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부서질 듯 몸을 내던지거나 굴렀다. 공연은 다섯 무용수의 동시다발적인 몸짓으로 이뤄진다. 각각은 독립적으로 움직이고 말한다. 남녀가 짝을 이루어 몸짓을 맞추기도 한다. 이러한 산발적인 무대 구성은 관찰자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스스로 보고싶은 곳을 보게한다. 때문에 관객 각각은 같은 공연을 보고 있었음에도 다른 기억을 가지고 공연장을 떠나게 된다.

주목했던 점은 한 동작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안무가 많았다는 것이다. 옷을 계속해서 갈아입는다거나 유혹적인 구애의 몸짓이나 성행위와 비슷한 동작들이 그것이다. 우리의 반복적인 일상을 보여주며, 그 속에서 또 되풀이되는 무수한 사건들을 나열한다. 그렇지 않은가. 다르다해도 비슷한 것이 우리네 삶이고, 손금처럼 각자 다른 인생을 산다지만 결국 똑같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 '애완동물' 안에서는 유독 남녀 사이 관계의 묘사가 두드러졌던 것 같다. 서로에게 애착을 갖는 남자와 여자가 있는 반면 서로를 증오 가득한 눈으로 응시하며 으르렁거리던 남녀가 있었다. 남자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여자가 있었는가 하면 남자를 세워두고 구애의 춤사위를 펼치는 여자도 있었다. 다가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가가는 관계의 아이러니를 전하기 위한 계속적인 시도들도 보였다. 무용수들은 얼굴을 통해서도 이야기했다. 수만가지의 표정으로 내게 전언한 감정들이 여기 있다. 기쁨, 환희, 황홀경, 진실, 만족과 불만족, 슬픔, 두려움, 고통, 증오, 환멸, 모욕, 비참함, 사랑, 고독, 혹은 무념, 무상. '애완동물'은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상황, 날 것 그대로를 보여준다. 이성의 여과 없이 제목 그대로 '동물'처럼, 본능적인 몸짓으로 말이다. 진실은 언제나 불편하듯,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은 다른 의미로 불편했다. 극 자체는 추상적이었지만 내 눈에는 사실적으로 비춰지던 공연이었다.


The dreamers 몽상가들. 프랑스 철학자 바슐라르(Gaston Bashelard, 1884-1962)는 상상력을 이미지를 창조하는 원동력으로 보았다. 몽상가들, 즉 상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다. 루이스 캐럴은 이상한 나라 원더랜드를 만들었고, 달리는 흐물거리는 시계를 그렸다. 마그리트는 중절모 신사를 비처럼 내리게 했고, 팀 버튼은 거대한 초콜릿 공장을 세웠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예술가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예술의 어느 영역이든지 다가서고 싶다면, 그 첫번째 발디딤을 '상상하는 것'으로 시작해봄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만든 세상을 매개로 스스로의 세계를 창조해보자. 가령 당신이 오르세 미술관이 있다면,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눈 앞에 두고 반짝이는 별과 굽이치는 붓터치에 감탄하고 있다면, 거기서 더 나아가 상상해보라. 바로 그 그림을 그리고 있는 고흐가 나라고. 나라면 어떤 심정을 어떤 생각을 하며 이 그림을 그렸을지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된다. 이따금씩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내 생각엔 현대무용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내가 직접 무용수가 되어도 좋고, 그 무용수의 역할을 상상해봐도 좋다. 줄거리가 있다면 감정이입을 하면 될 일이다. 예술감상의 첫번째는 몰입과 감정이입 그리고 상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론과 지식은 후행해도 괜찮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 예술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것이고, 예술이 일상이 되는 날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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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ting, Petting
João Manual de Oliveira

작품 제목인 '애완동물'이라는 단어는 강아지, 고양이와 같은 애완동물을 떠올리게 한다. Companhia, "cumpanis"는 음식, 식탁, 집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무용단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관계는 지배하는 관계, 상호의존적인 관계, 상호 창조적인 관계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소유한 자와 소유되는 자, 조련하는 자와 길들여진 자. 작품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내부에 있는 것보다 중요한 것들로 가득한 방으로 안내하는 일련의 모순되는 자극들을 선택하게 된다. 이질적인 물체들이 가득한 어두운 공간은 우리 자신을 느끼게 만들어주며, 우리의 영혼과 감정의 집을 만들어 준다.

'애완동물'은 인간관계의 모순을 탐구하며, 서로 사랑하는 순간들, 더 이상 남들과 달라지거나 독특해지기를 원하지 않는 순간들, 그리고 때로는 치명적이고 때로는 안정적이며 그러나 항상 복잡하고 모순으로 가득한 순간들에 대해 탐색한다. 올가 호리즈는 단지 이러한 관계의 집합을 보여주는 것 뿐 아니라, 물체들과 쓰레기 투성이이며 갇혀 있는 것 같은 공간의 미학도 보여준다. 무대 위 공간에서 물건들은 변하고 합쳐지고 재활용 되며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 무용수들은 물체들을 이용하여 물체들과 함께한다.

이 작품은 처음에 올가 호리즈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으며, 작품의 창작 과정은 동작을 만들어 내는 짦은 대본에 기초한 특정한 방법을 수반한다. 또한 무용수들이 다루는 물체들은 무대로 가져오기 위해, 올가 호리즈는 매우 통제된 방법을 작업에 사용하려 했으며, 그를 통해 '애완동물' 속의 혼돈 상태의 장면을 만들어 냈다. 즉흥이 끝난 후에는 장면들을 마치 영화처럼 편집하고 조립했다. 자르고, 선택하고, 제거하는 과정을 통해 작품 속 장면들은 처음에 만들어졌던 것과는 다르게 보인다. 

'애완동물'은 실험하고자 하는 의욕, 그리고 춤, 신체, 인간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과정을 계속하려는 의지를 표현한다.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는 마치 5명의 무용수가 만들고 파괴하는 하나의 수족관처럼 보인다. 이러한 특징들을 통해, 우리는 정신 분열, 성적 취향, 도덕, 사랑, 갈등, 그리고 타자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속 인간을 재현한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들의 중심에서 보여지는 격렬한 안무와 유대감이 있다.

'애완동물'에 대한 Daana Haraway의 글은 다름에 대한 생각에서 생기는 이러한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애완동물'은 감정적, 사회적,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작품이다. 공생 관계의 측면에서 깊게 살펴보면,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애완동물이 되기 시작하는지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관계, 훈련, 명령의 법칙에 의해 감정적으로 예측할 뿐이다. 작품 속에는 개도 없고 고양이도 없다. 단지 애완동물만 있을 뿐이다. 5명의 무용수들이 다양한 관계를 그려내며 관객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출처 서울세계무용축제 조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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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턱 없는 컬렉션을 선보이겠다는 서울세계무용축제 시댄스가 지난 9월 30일에 열렸다. 개막작 스페인 국립 안달루시아 플라멩고 발레단의 '이미지들'을 시작으로 30여개의 국제, 국내 프로그램들이 다채롭게 선보여질 예정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대중매체 노출로 현대무용이 더 이상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장르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여전히 현대무용의 대중화는 어려운 과제이다. 그 진입장벽을 허물고, 진정한 의미의 관객 개발, 무용저변 확대를 위한 서울세계무용축제 시댄스의 노력이 그 성과를 이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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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가을 바람에 기분 좋던 날이었다. 아름다운 클래식, 경쾌한 재즈 선율에 따라 움직이는 음악분수는 무지 이뻤다. 공연 혹은 전시를 보는 매번 아트인사이트에 감사하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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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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