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을 에세이- '고독에 관하여', 필사노트를 따라서 [문학]

글 입력 2015.09.29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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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책장 한구석에 묵혀두었던 필사노트를 집어들었다.

 ‘나는 나의 껍질을 깨고 진정으로 타인에게 헌신할 수 있을까?’는 무심한 성격에 대한 콤플렉스에 따라 내 인생 최대의 고민이다. 필사노트에 적힌 글들도 이를 반영하듯 대체로 혼자의 삶, 타인과의 삶에 관한 글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헤르만 헤세의 소설 <크눌프>의 구절이 인상 깊다.
 
 ‘고독’에 대한 크눌프의 이야기, 또한 고독의 진정한 의미를 완성시켜주는 글들을 통해 고민의 궤적을 따라가보자.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게 될 것이다.” 

- 영화 <올드보이> 중
 

쓸쓸하다. 이 대사를 볼때마다 혼란스럽고 아이러니한 기분이 든다.
   
 ‘함께 울지언정 진정으로 우는 것은 그 자신밖에 될 수 없으리라.‘
뒷말은 진실이라 여겨지면서도 많은 씁쓸함을 남긴다.
슬픔은 공감을 호소하는 듯이 보여도 사실은 굉장히 배타적인 감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슬픔은 오로지 자기 혼자만이 온전히 느낄 수 있다. 그 때문에 오로지 자신만이 그를 감당할 수 있고 그만큼 괴로워할 수도 있다. 이러한 슬픔은 느끼는 바로 그 순간에는 나의 존재를 이루는 최대의 요소가 된다. 사람들은 그 생생함에 매달린다.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는 절대적인 감정으로 느끼며 타인과 공유할 수 없게끔 깊게 몰두하고 독점한다.
반면 즐거움, 웃음은 공감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감정이다. 그것은 마치 나와 다른 존재로부터, 차이와 신선함을 발견했을 때 오는 쾌청함과 같다. 또한 즐거움은 상대가 자신을 알아봐주기를 바란다. 이처럼 즐거움은 상대로부터 기인하는 감정이자, 상대에게 인정받고 공감받길 요구하는 감정일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로 슬픔이 홀로서 독점하는 감정이라 한다면, 나와 완전히 일체가 되어 진정으로 울어줄 수 있는 이는 과연 없는 것일까. 절대적인 고독, 자신을 향한 끝없는 공허와 목마름 속에서 타인은 일체의 그림자도 허용되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크눌프> 속의 구절이 고민을 풀어낼 실마리를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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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소설 <크눌프>에는 삶의 의미와 해답을 찾아 스스로 방랑의 길을 택한 사내 ‘크눌프’가 나온다. 
그는 자신의 길에 대한 신념을 갖고서 여정을 시작한다. 방랑, 자유를 택한 만큼 고독을 짊어짐을 감수함과 함께 고독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다.

고독은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차가운 웅덩이와 같다. 어느 순간에나 켜켜이 스며오는 지독히도 생생한 감정이다. 고독으로부터 삶의 동력과 함께 피로감을 얻은 크눌프는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과 만난 환상 속에서 결국 삶의 회의감을 토로한다.
 
하느님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을 받았고 또 네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형제요, 나의 일부이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 받듯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었다.”
 
 -헤르만 헤세,<크눌프> 중



삶에서 동행한 많은 이들과의 인연을 완성하는 것은 고스란히 자기 혼자만의 몫이다. 내 안으로 그를 들이며 그와 함께할 결단을 내리는 수고와 그 인연을 감당할 동력은 개인의 근원적인 고독으로부터 나온다. 
고독은 나와 내가 대면하는 절대적인 시간이며 또한 공허와 나약함을 직면하는 순간이다. 이러한 나와의 끊임없는 질의응답 속에서 상대를 포용할 결단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들이 지나간 뒤에도 무엇인가 계속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약해져가는 어떤 파동, 주의하여 귀를 기울이면 포착할 수 없는 어떤 파동이.따지고 보면 나는 한번도 그 페드로 멕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갔었다. 
그러다 차츰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중
 

고독을 매개로 하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스스로를 향한 부름은 강하다. 자신을 향한 의심과 절망들, 그 애처로운 약동이 담긴 부름이란 공허하기 때문에 그만큼 강하다. 
하지만 자신을 채우는 것이 오직 이것뿐이라면 나라는 존재는 너무도 미약하고 불완전할 것이다. 나를 향한 타인의 부름은 나의 온전한 전부는 아니어도 적어도 일면에 대한 확신, 뚜렷한 색을 담고 있다. 그것은 공허하고도 단단한 껍질 속에 담기는 색색의 구슬과 같다.
결국 스스로를 향한 부름이란 이 구슬들을 모으고 품어 안음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고 완성해가는 동력이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들 한 사람 한사람은 지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 없이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보편적인 만인 공통의 죄만이 아니라. 우리들 개인이 이 지상에 사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죄가 있는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혼자 걸을 때마다 셋이 걷는 길은 달랐다. 셋이 걸으니 서로에게 신경쓰느라 혼자 걸을때처럼 이 됫를 세세히 보지 못할 것 같았으나 오히려 셋이기 때문에 보는 것이 더 풍부해졌다. 우리 셋 중의 누군가가 저것봐. 하며 어떤 곳을 가리키면 우리 셋은 하나가 되어 일제히 그곳에 눈실을 주곤 했다. 거기엔 혼자가면 다른 것을 보느라 미처 보지 못했을 것들이 펄쳐져 있곤 했다.”
 
-신경숙,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중


“전 가끔 생각해요. 타고난 재능이란 그 사람에게 주어진 인생을 말하는 거라고. 그런 점에서 언니는 언니 자체가 시열이의 재능인 거예요.”

-윤지운, <눈부시도록> 중



 
 
필사노트에 적힌 수많은 글들, 그리고 크눌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을 통하여 첫 구절을 통해 느꼈던 고독에 대한 회의가 걷혀갔다. 
고독은 분명 고독만의 힘을 갖는다. 그러나 고독이라 해서 타인을 등지는 것이 아니다. 고독의 여백은 상대가 들어오는 자리가 될 수 있다.

 



 필사노트의 마지막 글은 작년에 쓰여진 것이었다. 씁쓸하다. 원하던 공부를 하고 있음에도 온전히 나에게 충실한 삶, 생각하고 음미하는 여유는 그때보다 더 줄어들어 버렸다. 
이번을 계기로 나는 이 무기력을 극복하고 싶다. 필사하던 그때의 생각들을 되짚으며 내 시야에 덮인 성에를 녹여내고 싶다.
 



이미지 출처


[최인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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