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미술 읽기(4): 가을의 리듬 Autumn Rhythm [시각예술]

글 입력 2015.09.16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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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읽기(4): 가을의 리듬
Autumn Rhyt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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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도/ 기다리지 않고/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채/ 홀로/ 하루를 보낸다/ 설렘 없이/ 울렁증 없이/ 슬픔 없이/ (중략)/ 그런 마음이다/ 견디는 바 없이 보내는/ 이런 드문 하루는/ 가볍고 가볍다/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 가을이/ 눈동자만큼 깊다/ 아침이었는데/ 벌써/ 저녁이다/ 하루살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 강기원, 어떤하루
 

한 계절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완연한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요즘이다. 한낮은 가을햇살로 따갑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분다. 늦은 오후, 옷장에서 가디건을 꺼내 걸치고 한강공원으로 산책을 나선다. 정신없이 빠른 일상을 살면서, 계절의 변화 정도는 있는 힘껏 느끼고 싶어서다. 가을과 어울릴만한 노래도 몇 곡 챙긴다. 하나를 꼽자면 Falling Slowly. 나는 보통 청담대교를 끼고 있는 뚝섬 공원이나 서울숲을 걷는데, 사람이 보이지 않는 길을 조용하게 그리고 느리게 걷고싶을 때면 주말의 학교 산책로로 향한다. 잠깐의 소낙비가 내린 뒤 청명해진 하늘이 신비로운 푸른빛을 감고돈다. 이런 날, 사물의 명암과 윤곽이 더욱 또렷해진다. 심지어 내 안에 엉켜있던 무수한 감정들을 정돈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가볍고 가볍다. 강바람의 스산함이 살결 사이사이를 스며듬을 느낀다. 눈을 감아본다. 눈을 감으면 청각이 예민해진다. 내딛은 발 아래로 마른 낙엽이 바스락 거리며 부서지는 소리, 잠자리 날개 파르르 거리며 하늘을 유영하는 소리, 찌르르르 귀뚜라미 소리, 이따금씩 나무에서 작은 열매가 떨어지는 소리, 바람의 리듬에 맞추어 여유롭게 넘실대는 강물 소리가 들린다. 아, 이젠 어김없는 가을이다.

가을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집으로 돌아와 이 글을 쓴다. 사실 가을 하면 '폴록의 가을의 리듬: 넘버 30'가 가장 먼저 머리를 스친다. 내게 가을은 높아진 하늘로부터 오기도 하지만, 사각형의 캔버스로부터 오기도 한다. 봄, 여름, 그리고 겨울에 가을의 정취를 느끼고 싶을 때면, 가을과 닮아있는 그림을 찾곤 한다. 캔버스가 크면 클수록 좋다. 내가 이 계절을 좋아하는 건, 외로움과 가장 잘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홀로됨을 온전하게 느낄 때 가장 황홀한 자기 긍정을 맛볼 수 있으니까. 더군다나 폴록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헝클어진 내 생각을 보는 듯 하다. 통제되지 않은 채 이리저리 흩뿌려진 물감들은 마치 정리되지 않은 마음과 감정 같다. 하지만 이 멋대로인 그림을 보며 되려 평안함을 느끼는 건, 슬픈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펑펑 흘린 후 개운해짐을 느끼는 이치와 같을 것이다. 솔직한 나와 마주하면서 느끼는 감정의 해방. 흰색, 검은색, 밝은 갈색, 청회색 네가지 색으로 만들어낸 한 폭의 운율은, 이 가을의 리듬은 내 몸을 감싸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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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나는 내가 무엇을 하는지를 의식하지 못한다. 다만 그것이 끝났을 순간에야 비로소 내가 무엇을 한지를 볼 뿐이다. 나는 변화를 시도하거나 이미지를 파괴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림이란 그 자체 존재로서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젤에서 캔버스를 떼어내 바닥에 눕히고 손 닿는대로 마음 가는대로 물감을 흘리고, 뿌리고, 던지고, 끼얹었던 폴록. 순간순간 달라지는 예술의 경험, 작위하지 않은 생생한 부딪힘, 정확히 예견할 수 없는 그의 작품 앞에서 폴록은 그 자신이 되었고, 나는 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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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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