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헤르만 헤세, 세계의 두 얼굴과 그 경계 속에서[문학]

글 입력 2015.09.06 17:58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hesse.jpg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 , 1877. 7.2 ~ 1962. 8.9)는 독일의 작가이자 화가이다. 
저서는 <데미안>(1919), <싯다르타>(1922), <황야의 이리>(1927), <지와 사랑>(1930)
등이 있으며  1946년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헤세는 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에 몰두하는 학자적 면모와 영혼의 고취와 표현을 갈망하는 예술가적 면모 사이에서 갈등해왔다. 그에게 소설은 이러한 인생의 문제를 풀어가는 탐구의 과정이자, 그로서 성장해가는 삶의 궤적 자체이다. 그는 서로 다른 양자가 공존하고 조화되는 이치와 양상을 내면 뿐 아니라 세계의 본질로서 발견하며 인간과 세계를 향해 진실과 양심, 평화의 가치를 말해왔다. 그는 분열된 세계 속에서 인간 스스로의 탐구와 분투로서 이르는 조화와 공존의 가치를 호소하며 20세기의 지성과 양심을 대표하게 된다.
그가 내면의 화해에 이르는 여정, ‘존재의 양극성’으로 대표되는 세계를 자전적 소설인 <데미안>과 또다른 대표작인 <지와 사랑>을 통해 살펴보자.


 
0831974c0600d81a1212778ba505bd55104101.jpg
 

 
<데미안> 에서는 헤세의 예술 속에서 존재의 양극성의 대표적 상징이 된 ‘아프락사스’- 신이자 악마인 존재가 등장한다. 어두운 세계와 밝은 세계, 악마성과 천사성은 하나의 세계에 공존하는 두 얼굴이다. 
이를 인지하고 그 경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카인의 후예들이며 그들은 아프락사스를 품은 영혼의 증표로서 이마에 표적을 달고 있다. 카인의 후예들은 세계를 직시하는 눈을 갖고서 운명이 문을 할퀴며 닥쳐오는 때에 그 바로 앞에 서서 운명의 의지에 접근한다. 그들은 한 세계의 죽음인 동시에 탄생의 순간을, 거대한 새의 형상을 직면하면서 그 태동을 느낀다.
 
 

유년시절, 세계의 양면성에 대한 의문을 지녔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 그에게서 여자이자 남자인 얼굴, 성숙한 어른이자 순수한 아이로서의 얼굴을 발견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표적을 가진 이들, 카인의 후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서 그와 헤어진다.
데미안과의 강렬한 만남 이후 그는 계속해서 자기의 내면에 귀 기울이고 파고드는 훈련을 통해 아프락사스를 발견하게 된다. 이는 그가 처음 연정을 품었던 베아트리체의 얼굴로 떠올랐으며 점차 정체를 가늠할 수 없으면서도 그리운 향수를 품은 양성적인 얼굴로 변화해간다. 그는 포근한 어머니였다 순식간에 무섭고도 폭압적인 얼굴로 변하는 영상을 점차 모든 사물로부터 발견하며 마침내 그로부터 데미안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마침내 재회한 데미안과 그의 어머니인 에바부인은 싱클레어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 속 꿈의 영상을 간직한 채 그에 충실하라 말해준다. 싱클레어는 그 자신이 표적을 지닌 이로서 에바부인을 통해 만난 다른 카인의 후예들과 함께 세계에 닥쳐오는 운명을 직감한다. 그것은 세계대전의 광풍이었다. 전장 속에서 다시 마주한 데미안은 자기 내면에 귀 기울일 때에 자신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란 말을 남기고서 떠나간다.




17097413.jpg
 

<지와 사랑> 은 각기 ‘지’와 ‘사랑’으로 대표되는 두 인물인 나르치스와 골트문트의 이야기이다. ‘존재의 양극성’은 서로 다른 성질의 영혼을 지닌 그들이 각기 철학자, 은둔자와 예술가, 방랑자로서 자아를 발견하고 완성해가는 여정 속에서, 또한 각자가 서로에게 이정표가 되어주는 인연의 얼개 속에서 나타난다.
   
 

독일 마리아브론 수도원의 젊은 수도사 나르치스는 다른 이의 성질을 파악하는 남다른 재능과 지성미를 가지고 있었다. 골트문트가 그곳에 신학생으로 들어온 이후 둘은 서로에게 이끌리며 둘도 없는 사제지간이자 친구사이가 된다. 골트문트는 나르치스를 동경하여 그와 같은 신실한 신학자가 되길 열망한다. 그러나 나르치스는 골트문트 내부에 무언가가 은폐되고 어그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서 그가 수도원 바깥에서 그의 본질에 따라 살아가도록 이끈다. 나르치스와 이별하고 수도원 밖으로 나온 골트문트는 집시 여인 리제를 만나 원초적 사랑과 진정한 삶과 세계에 대해 경험하게 되고 이후 기사의 딸 리디아, 농부의 아내, 유대인 소녀, 공작부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여인들과 사랑을 나눈다. 방탕하고 세속적인 생활과 들야에서 겪는 추위와 죽음의 위기를 통해 골트문트는 고통과 환희라는 삶의 두 얼굴을 마주하며 진정한 예술의 경지, 세계의 아름다움에 이르러 간다.
 골트문트는 스승을 만나 조각가의 길을 걷고서 다시 방랑을 계속하는데 공작부인과의 스캔들로 사형을 당하게 된 성에서 우연히 나르치스와 재회한다. 이후 그는 나르치스와 함께 수도원으로 돌아가 마리아상의 조각에 몰두한다. 삶의 갈증을 느낀 골트문트는 다시 여정을 떠나지만 얼마 못가 사고를 당해 병들고 지친 모습으로 돌아와 나르치스의 곁에서 눈을 감는다.
 


 나르치스가 일깨워준, 골트문트가 처음 세상으로 나서게 한 그의 예술적 자아는 ‘어머니의 형상’으로 상징된다. 
이는 그의 여정 속 사랑을 나눈 무수한 여인들의 모습 속에서 점차 뚜렷해지며 계속해서 그를 원초와 예술의 세계로 이끈다. 때론 죽음을 낳는 잔혹하고 흉포한 마귀로, 또는 자애로운 어머니로 나타나는 얼굴은 그에게 점차 세계의 가장 완전한 모습이자 진실된 얼굴로 다가온다.
 골트문트는 이를 농부 아내의 산고의 고통, 마리아 석상, 유럽을 횡횡하는 흑사병 등으로 마주한다. 극도의 고통에 신음하는 모습인 동시에 극락의 희열에 빠진 모습을 그는 깊은 고통과 평온이 혼재하는 마리아의 얼굴로 빚어냄으로서 지와 사랑의 완전한 조화. 예술을 완성하고 죽음을 맞는다.
 
 나르치스와 골트문트라는 두 대비되는 영혼은 서로 만날 수 없이 평행하여 각자의 길을 가면서도 끊임없이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지탱해준다. 마치 두 영혼이 각자의 길을 걸어 이룬 궤도가 서로 얼개를 맞추어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듯이 말이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과 자아에 대한 몰두 속에서 우리 시대가 잊어버린 삶의 가치와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 자연과 정신, 지성과 예술이 하나의 세계 속에서 이루는 공존을 향한 분투를 통해 우리의 내면과 외부는 조화와 균형을 갖는다. 또한 자신의 본질과 신념에 충실한 삶은 다른 무수한 것들과의 어울림과 공존을 꿈꾼다. 이처럼 헤세는 개인과 사회를 향해 포용과 균형의 가치를 말하는 예술적 소명을 몸소 실천한 시대의 지성인이었다.

     
[최인영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1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