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살아있는 기억의 순간들을 느끼게 해준 멋있는 연극 [기억의 체온]

단순한 도플갱어가 아닌 '기억의 실체화'에 대한 이야기
글 입력 2015.07.23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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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장황한 프리뷰에 앞서 나는 문화 생활, 특히 공연을 볼 때는 사전정보도 최대한 줄이고 '나만의 시각'으로 판단하려고 노력한다. 아무래도 사람인지라, 누군가의 추천 내지는 해석, 호불호가 나의 내면에서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내가 하는 모든 이야기 역시 하나의 의견일 뿐이라는 것을 꼭 염두에 뒀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리뷰는 다량의 내용 스포가 포함되어 있으니 조심조심!



기억의 체온(201507꼴통) 포스터.jpg
 




첫번째 아트인사이트 문화초대에 당첨되어 보게 된 연극 기억의 체온.
애초에 많은 정보를 알고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에 최소한의 정보만 알고 오랜만에 친구와 대학로를 찾았다. 예술공간 서울 이라는 극장은 처음 가봤는데 골목 사이에 있어 굉장히 의외였다.


미리 입수하고간 정보에 따르면 이 연극의 소재가 '도플갱어'라는 것은 알았다. 도플갱어라는 소재를 두시간 가까이 되는 연극에서 어떻게 녹여냈을지도 기대됬을 뿐더러 공간과 표현의 제약이 큰 연극에서 어떤 방식으로 연출했는지도 매우 궁금했다. (참고로 말하면 두 도플갱어가 만나는 장면은 거울을 통해서 하셨는데 웃기면서도 그럴수 밖에 없다고 이해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굉장히 재미있었다.


 근래에 본 연극 중에 가장 재미있었다. 마음에 없는 소리 협찬받았다고 할 성격이 못되는데, 진짜 돈주고 다시보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같이 데려갔던 친구도 꽤나 외진 곳에 있는 극장에 가며 도대체 뭐하는 연극이냐고 투덜댔던 것이 무색할 만큼 연극이 끝나자 재미있었다며 극찬을 했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말하자면 가나메는 남편 시게루와 이혼을 결심하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오빠 데루오가 사는 집으로 내려와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지내고 있는데, 자신을 따라 내려온 시게루에게 다시 도쿄로 돌아가라며 쏘아 붙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게루는 기억이 없다고만 말하고, 도쿄에 있는 회사에는 여전히 시게루가 출근하고 있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질척댄다고 생각해 쳐내기만 하던 가나메는, 시게루의 상황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고, 오빠 데루오의 몇가지 실험을 통해 진짜 도플갱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 제2의 시게루를 만난 장소의 가게로 찾아가 진상을 밝히려는데 그 가게의 주인인 시마씨도 부인인 교코도 같은 일을 겪었다며 이야기 해준다. 그 일을 계기로 가게의 이상한 힘을 밝혀내고, 그 힘은 다름 아닌 [정말 그럴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사실은 이뤄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무것도 없는 빈 상자에서 슈크림빵이 있다고 믿으면 정말로 슈크림빵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에 믿음을 조작하는 것이 아닌, 진실된 마음으로 [의심의 여지 없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때문에 가나에가 원한 [자신을 따라와 잘못을 비는 시게루]의 모습이 원형을 빌어 시게루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실제 도쿄에 존재하던 시게루에게서 그 부분만 빠져나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교코의 사례를 통해 각각의 인간의 형상을 한 대상은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경험을 하게 되고, 그 시간만큼의 간극을 가진 채 도플갱어가 마주치게 되면 하나로 합쳐지면서 기억의 혼란을 줘 정신이 이상해진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가나에와 데루오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은 시게루의 모습을 정상적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 위험한 작전을 펼친다. 시게루 원형 (시게루1)과 두번째로 만들어진 시게루 (시게루2)는 현실 시간 상으로 이틀의 간극이 생겼다. 그래서 그들은 시게루를 합체 시키기 전에 혼란을 없애기 위하여 분할 직후 생긴 이틀의 시간만을 지닌 시게루3를 만들어 놓은 뒤, 시게루 1과 2를 합치기로 계획한다.

글로보면 이해가 안갈 것 같아 도형으로 간단하게 표현해 보았다.




<시게루 합치기 계획 도식화>
슬라이드1.JPG

먼저, 원래 상태의 시게루, 즉 시게루 완전체를 온전한 원이라고 가정해 보자.
가나에가 시마씨의 가게에서 의도치 않게 시게루를 생성한 시게루를 시게루2 라고 부르기로 하자. 새로운 인물이 생기면 그 전의 인물에게서는 기억이 없어지므로 시게루는 두 사람으로 깔끔하게 분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림에서 분홍색, 즉 원래 시게루에서 두번째 시게루 빠진 상태를 시게루 1이라고 칭하고 파란색은 시게루2 라고 생각해보자.
 
슬라이드2.JPG

문제는 그렇게 갈라진 상태에서 이틀의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각각의 시게루는 다른 장소, 다른 인물을 만나며 다른 기억을 쌓았다.
 
슬라이드3.JPG

두 인물간의 기억이 간극이 생길 경우, 합쳐졌을 때 혼란이 올 수 있으므로 문제가 된다.
 
슬라이드4.JPG

때문에 그들은 시게루 1,2 에게서 이틀의 시간을 빼기로 계획한다. 즉, 이틀만의 시간을 가진 시게루3를 만들어 시게루1,2에서 이틀간의 기억을 없애는 방법을 쓰는 것이다.
(새로운 인물이 만들어지면 전의 기억이 없어짐!)

 
슬라이드5.JPG

가정부 유카리의 도움을 받아 시게루3를 만들어 내는 것에 성공한 그들은 바로 시게루 1,2를 합쳐 다시 시게루 완전체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슬라이드6.JPG

문제는, 이해를 돕기 위해 도식화 하긴 했지만 실제로 만들어진 시게루3 역시 사람이라는 것이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만들어진 시게루3를 마치 필요없어진 데이터를 삭제하듯이 없애버리려고 했던 데루오는 결국 사람을 죽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가나에의 말에 동의하고 제거하지 못한다. 가나에 역시 자신의 미련과 기억으로 이루어진 시게루3를 없애지 못하고 자신이 '잊어버림'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없애겠다고 다짐한다.





연극을 보는 내내 참신한 구성과 전개로 내용이 흥미로웠지만, 그 외에 시사점도 굉장히 많았다.
한 인간에 대한 기억과 정보를 형상화 할 수 있다는 설정,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공간 설정에서 도플갱어라는 소재가 불가피하게 쓰였다고 볼 수 있다. 가나에가 시게루에게 가진 미련과 옛 추억을 또다른 시게루라는 인간의 형상으로 상징적이게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만들어낸' 사람이며 또 '그녀가 잊으면 없어지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강력하게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이 연극은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맨 처음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는 장면에서 신성한 돌을 가져다 놓으면 현저히 준다는 장면은 괜히 등장한 것이 아니다. 사람의 믿음, 또 그 강력성, 그 강력한 믿음에서 나오는 신비성을 함축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다. 그 특별한 공간, 즉 가게에서는 사람의 믿음을 실현시켜 준다는 극단적인 형태를 통해 우리에게 꺼내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서는 믿음만 온전하다면 없던 음식이 생기기도 하고, 초자연적인 일들도 벌어지며 하다못해 사람까지 생겨나니 말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런 극단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가나메가 마지막에 시게루3를 안고 자신이 '잊는다'며 울던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잊는다.

사람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다. 좋던 싫던 간에 사람은 언젠가는 잊는다. 그 순간에 대해 느꼈던 감정은 희미해지고 옅어지며 종국에는 감정이 배제된 '사실'만이 남는다. 그녀가 시게루에게 가지던 미련과 추억은 또다른 사람을 만들 정도로 강력했지만 언젠가는 그 사람 마저도 없어지게 할 만큼 옅어지는 시간이 올 것이란 걸 암시하는 것이다.


추억의 형상화, 기억과 잊음에 대한 표현을 아주 극적인 구성으로 재미있게 풀어낸 것이다.
더불어, 도플갱어로 태어난 인간 역시 하나의 인간이자, 누군가에게 존속되거나 부차적인 존재가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가진다고 얘기하고 있다. 시게루3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유카리를 투입한 장면에서 그녀가 시게루에게 한 대사는 이러한 대목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시게루 당신은 그 누구의 아류도 아니며 그저 시게루일 뿐이라고.
이 장면을 보며 이 짧은 2시간안에 이 연극은 참 많은 것을 담아냈구나, 하는 감탄마저 들었다. 여러 감정과 깨달음을 동시에 주고 간 연극.

마지막 엔딩이 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와 재미있었다며 말하던 그 순간까지, 무엇하나 만족하지 않은 시간이 없었다.




기억의 체온.

왜 제목이 기억의 체온인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기억도 체온을 가진다. 살아있는 유기체인 것이다. 우리의 기억은 비록 시게루 처럼 인간의 형상을 하고 나타나지는 않지만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머릿속을 배회하며 원하지 않는 순간에 튀어나오기도 하고 다시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은 잊어버릴 것이며, 시간은 흐르고 한단계 성숙해질 것이다. 기억의 특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제목은 말그대로 '따뜻했던' 두시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 하다.


멋진 연극을 보여주신 아트인사이트 관계자 분들과 배우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보내고 싶다.







서포터즈5기_이주하님 태그.jpg
 



 


[이주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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