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미술 읽기(1): 내게 다 말해줄래요 [시각예술]

질리안 웨어링
글 입력 2015.07.20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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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읽기(1): 내게 다 말해줄래요


2015-07-20 17;56;26.PNG▲ 김희선, 해우소 가는 길, 2012, 사운드 시각화 모듈세트와 가변 세트
 

3년 전(2012), 대구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디아티스트-프로젝트룸'이라는 전시에서 나를 충격에 빠뜨린 작품 하나가 있었다. 김희선 작가의 '해우소 가는 길'이 바로 그것이다. 김희선 작가는 바람소리, 새소리, 나뭇잎 굴러가는 소리, 귀뚜라미 소리 등이 들리는 사운드 시각화 모듈세트 25개와 소나무 향이 짙게 풍기는 해우소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았다. 듣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는 소리들을 지나 막다른 구석에 위치한 해우소 안으로 들어가면 의자와 책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책상 위에는 종이와 연필이 있는데, 종이에 무엇을 쓰라는 지시사항 같은 것은 없었다. 생각했다. "해우소란 근심을 푸는 곳이니, 근심을 적으라는 건가보다". 처음 연필을 쥐었을 땐, 한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하고있는 생각부터 적기 시작했다. "아침을 먹지 않아 배가 고프다"라든가 "오래 걸어서 종아리가 아프다"같은 것들 말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내 안의 내밀한 사정까지 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 이야기로 종이를 빽빽히 채우고 나니, 마음에 졌던 응어리가 풀어지는 듯 했다. 가슴 속에 짓눌려 있어 알아채지 못했던 내 감정들을 쏟아내면서 느꼈던 일종의 카타르시스는 그 날 이후에도 일기장에 하소연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무례하지 않는 범위에서 내 감각과 감정에 진솔하되, 그렇지 못했거나 그럴 수 없었던 것들은 글로 풀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솔직한 사람이 아니였다. 난 누군가의 딸로, 누군가의 누나로, 누군가의 친구로, 누군가의 후배 또는 선배로 수 겹의 페르소나를 쓰고 살아가면서 정작 내 맨 얼굴에는 신경쓰지 못했었다. 우리는 일상의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거짓말을 한다. 가령 내가 당신에게 "오늘, 기분 어때요?"라고 묻는다면 당신은 필시 "괜찮아요" 혹은 "좋아요"라고 말할 것이다. 심지어 당신이 괜찮지 않은 날에도 말이다. 그것은 자신의 약하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이거나 괜히 분위기를 해치기 싫어서 일 것이다. 혹은 굳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할 수도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에서 멀어지는 경험을 매일 한다. 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을 찾는다. 자신의 가식을 내려놓고 속사정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을 기다리며, 내면의 갈등을 상담할 수 있는 이를 갈구한다. 자기를 드러냈을 때 창피하다거나 불편하다는 느낌이 아닌 온화하고 편하다는 느낌을 받고 싶어한다. 이런 인간의 심리를 이해하고, 위로의 손길을 건넨 한 작가가 있다. 



질리안 웨어링 Gillian Wearing

"나는 언제나 사람들에 관한 것을 발견해내는 방법을 찾고자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2015-07-20 17;57;04.PNG▲ 질리안 웨어링 Gillian Wearing
 

질리안 웨어링(Gillian Wearing)은 영국의 사진 작가이자 비디오 아티스트이다. 1980년대 말에 결성된 영국현대미술의 주역 yBa(young British artists) 소속으로,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97년 터너 프라이즈를 수상하면서 작품성을 인정 받았으며, 미술 비평가인 블레이크 곱닉(Blake Gopnik)에 의해 '오늘날의 가장 중요한 미술가 10인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한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에 관한 것을 발견해내는 방법을 찾고자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라고 말했던 그는 인간의 외면과 내면, 그리고 개인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한 관심은 작품 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당신이 말하려던 것을 쓴… >
 
2015-07-20 17;57;26.PNG▲ 질리안 웨어링, 당신이 말하려는 것을 쓴 사인과 타인들이 당신이 말하려는 바를 쓴 사인, 1992-1994, c-type 프린트
 

600여 장의 컬러 사진 시리즈인 <당신이 말하려는 것을 쓴 사인과 타인이 말하려는 바를 쓴 사인 Signs that say what you want them to say and not Signs that say what someone else wants you to say>은 웨어링이 대학을 졸업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그를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게 만든 작업이다. 런던 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종이 한 장을 주고, 떠오르는 생각을 쓰라고 부탁한 다음 그 종이를 들고 서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관습과 인상이 그들이 적은 글귀와 얼마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려 하였다. 위 사진 작은 <당신이 말하려는 것을 쓴…> 시리즈 중 하나인 <나는 절망적이다 I'm desperate>이다. 전혀 절망적이어 보이지 않는 남자의 손에 들려있는 "나는 절망적이다"라는 무언의 외침은 잔잔하게 마음을 울린다. 왜일까?

아마, 우리가 그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어서일 것이다. 사진 속의 남자가 "나는 절망적이다"라는 글귀를 들고 있지 않았더라면, 우리 중 누구도 그가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감정을 숨길 수 있게 되는 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것임을 조금씩 이해해가는 과정에서 내면과 외면 사이의 간극을 체험하게 된다.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지 못했던 경험을 겪지 않은 이가 있을까? 한 이미지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우리의 고민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1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구나. 나만 바보같이 굴고 있는 게 아니구나. 모두 그렇게 살아가고 있구나.



<비디오에 모두 고백하세요…>



2015-07-20 17;57;52.PNG▲ 질리안 웨어링, 비디오에 모두 고백하세요 당신은 변장할거니 걱정마세요 흥미를 느낀다면 질리안에게 전화하세요, 1994
 

30분짜리 컬러 비디오 <비디오에 모두 고백하세요. 걱정 마세요. 변장할 거니까요. 관심 있어요? 질리안에게 전화하세요 Confess All on Video. Don't Worry You Will Be in Disguise. Intrigued? Gall Gillian>는 질리안 웨어링의 또 다른 대표작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그가 작업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하기 위해 낸 광고 문구와도 같다. 그는 영국의 인기 주간지 '타임 아웃(Time Out)'에 광고를 내어 10명을 섭외한 뒤, 그들의 고백을 비디오로 찍는다.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쓴 참가자들은 웨어링의 카메라 앞에서 꺼내놓지 못했던 비밀이나 지난 날의 후회 등을 털어놓는다. 자아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드러내기엔 너무 커버린, 변장을 하고서야 비로소 솔직해질 수 있었던 그들은 그렇게나마 마음의 위로를 받고 돌아갔을 것이다.

 


 
Reference


이미지
대구 미술관 홈페이지

자료
네이버 지식 백과 페르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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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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