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귀싸대기 맞을 각오가 되어 있는 작가, 김언수 [문학]

글 입력 2015.07.17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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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수

1972년 부산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

"캐비닛" 문학동네, 2006
"설계자들" 문학동네, 2010
"잽" 문학동네, 2013



나에게 김언수는 책 제목보다, 이름보다 수상소감으로 기억되는 작가였다.
 
(전략) 나의 선생은 소설쟁이가 농부, 어부, 막노동꾼처럼 자신의 가족을 위해 신성한 밥벌이를 하는 성실한 사람들에 비해 두 수쯤 아래에 있는 존재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선생이 틀렸다. 소설을 쓰고자 하는 가장 근원적인 욕망은 허영이므로, 소설쟁이는 그들보다 최소한 세 수쯤은 아래에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독자들은 작가에게 관용이란 걸 베풀 필요가 없다.
당신이 이 저열한 자본주의에서 땀과 굴욕을 지불하면서 힘들고 어렵게 번 돈으로 한 권의 책을 샀는데 그 책이 당신의 마음을 호빵 하나만큼도, 붕어빵 하나만큼도 풍요롭고 맛있게 해주지 못한다면 작가의 귀싸대기를 걷어올려라. (중략)
그런데 내가, 겁도 없이, 책을 내게 되었다.
분수도 모르고 덜컥 상까지 받아버려서 이제 빠져나갈 구멍도 없다. 하지만
귀싸대기 맞을 각오는 되어 있다.
 
이 수상소감이 실린 소설은 「캐비닛」이다.
 




김언수_캐비닛.jpg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심사위원 만장일치
 
「캐비닛」은 공기업 부속 연구소에서 일하는 '공대리'가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고 4층 복도 끝 자료실, 13호 캐비닛에 달린 네 자리 번호의 자물쇠를 풀게 되면서 일어난 이야기이다.
 
13호 캐비닛에는 손톱에서 나무가 자라는 남자, 느닷없이 긴 잠에 빠지는 토포러, 부끄럽고 불행한 과거를 지우는 메모리 모자이커, 시간이 사라지는 타임스키퍼, 서로의 육체를 교환하는 사람들인 다중소속자, 고양이가 되고 싶은 남자와 마법사 등 ‘심토머’에 대한 서류가 있다.
 
김언수는 다중소속자를 이야기하며 레오나르도 다빈치, 뉴턴, 갈릴레이, 콜럼버스가 다중소속자라고 한다. 그들이 그 짧은 생애 동안 어마어마한 일들을 이룩한 건 일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그래서 모두 허구의 것이지만 읽다 보면 그럴싸한 느낌에 구글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진다. 콩으로 만든 고기라는데 아무래도 고기 같아서 제품 뒷면 빼곡한 글씨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읽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한 가지 에피소드만으로도 소설 한 권이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흥미롭고 신선하고 때로는 유쾌하다. 그런데 이것들이 허구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일상에 대한 은유, 공감에서 오는 위로

“저의 사라진 시간들은 지금 어디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는 걸까요. 그걸 생각하면 참 가슴이 아파요.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누군가를 위해 아름다운 일을 할 수도 있는 시간이잖아요. 사라진 시간 속에서는 아무것도 없어요. 낭비도, 폐허도, 후회도, 상처도, 그리고 그 시절을 살았다는 느낌도 없죠.” 183쪽
 
타임스킵의 경험자의 발언인데 읽는 내가 뜨끔했다. 나는 한때 시간을 쓰레기로 만드는 무익하기만 한 재주를 선보인 적이 있다. 어디선가 데굴데굴 굴러다닐 사라진 시간, 그 시절을 살았다는 생생한 느낌도 없는 시간. 글자가 나를 돌려 까는 것만 같았다.
 
“왜냐고요? 당연히 능력을 키워서 성공하고 싶고, 돈을 많이 벌어서 부유해지고 싶으니까 그런 거죠. 권력과 부. 그것이 자본주의의 유일한 목표 아닌가요? (중략) 물론 이것이 시험에서 커닝을 하는 것처럼 공정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쯤은 저도 알아요. 하지만 어차피 이 세상은 태어날 때부터 공정하지 않잖아요? 혼자서 열심히 한다고 되는 세상도 아니고요.” 135쪽
 
기회나 조건의 평등이 주어지지 않아서 편법을 써서 결과의 평등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그렇게 해서 자본주의의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부조리를 말한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이해가 간다. 현실에는 없는 것은 다중소속자일 뿐, 불평등과 편법의 부조리한 세상이 아주 확실하게 존재하기 때문일까.
 
“너무나 많은 타인들의 간섭으로 인해 나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잊어버렸습니다. … 간섭은 나쁜 겁니다. 인간은 타인을 결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인간은 육체와 정신을 통째로 빌린다 해도 결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가 없어요. 타인의 입장이라고 착각하는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니 함부로 타인을 이해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바로 거기서 끔찍한 폭력이 발생합니다.” 237쪽
 
이 문장이 단순히 다중소속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내가 받은 상처와 자각도 하지 못하고 남에게 주었을 상처가 떠오른다. 너무 쉽게 네가 왜 힘든지 안다고, 이해한다고 위로한다. 이해했다는 착각에 빠져서 위로했다고 오해한다. 책은 세상과 존재, 나아가 인간관계까지 이야기한다.
 
“"아니, 한 사람의 인생을 단 열 줄로 요약하라니 이게 도대체 말이나 돼?" 하고 투덜거릴 때, 나는 그 속에 집어넣을 단 몇 줄의 제대로 된 인생도 없어서 참담한 느낌이 들곤 했다.” 167쪽
 
“존재감이 한없이 작아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고 어떤 순서도 내게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가 호치키스나 진공청소기보다 못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이 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가치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눈치채게 되는 것이다.” 226쪽
 
「캐비닛」은 소재와 작가의 문체, 시선 말고도 감탄할 부분이 많았다. 허구 사이사이에 들어있는 현실이 내 것들과 닮아있었다. 콩으로 만든 고기라는데 진짜 고기 같네, 신기하네. 하다가 문득 내가 콩으로 만든 고기가 아닌가, 고기가 아닌 데 고기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거 아닌가. 의심의 화살이 나에게로 돌아왔다.
 


기분 좋은 아쉬움이 남는 작가 

아주 잘 쓰인 책이라고 단언하지는 못한다. 공감하고 위로를 받고 그의 유머에 웃기도 하고 신기함과 흥미로움에 감탄했지만, 텐션이 일정하게 유지 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아쉬움도 가지고 있다. 책은 1부, 2부,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3부는 앞서 흐름과 분위기가 다른 탓에  급작스런 장르변환처럼 느껴졌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더 잘 풀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김언수라는 작가의 발견이 그 작은 아쉬움을 털어낼 수 있게 했다. 아쉬움만을 논하기엔 좋은 부분이 많아서 아쉬움은 살짝만 묻혀야 할 것 같았다.

『캐비닛』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 그다음 발매된 『설계자들』을 읽었다. 400쪽 남짓한 조금 긴 분량의 책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텐션을 유지했다. 『캐비닛』이 마음에 들면서도 아쉬웠다면 다른 작품을 읽는 것으로 그 아쉬움을 해소하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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