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 그리고 철학(1): 사유해야 할 의무 [예술철학]

영화 < 피아니스트 >와 < 쉰들러리스트 >를 보고 떠오른 생각에 대하여
글 입력 2015.07.06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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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리고 철학(1): 사유해야 할 의무
 

그런 영화들이 있다. 관객과 평론가 사이에서 굉장히 좋은 평을 얻고 대작이라고 불리며 심지어 권위있는 상까지 받았음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볼 기회나 시간이 없었던, 혹은 시도조차 하지 않은 영화. 그러면서도 '봐야하는데..'라는 생각을 수십 번 하게 만드는 마음 속의 짐 같은 영화들 말이다. 예를 들자면 <대부>나 <쇼생크탈출>. 영화 <피아니스트> 또한 그 목록에 속했었다. 최근 <피아니스트>의 리마스터링 재개봉 소식을 듣고서 이 부채감을 덜어내는 데 더없이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까운 극장을 찾았다. <피아니스트>를 본 후 '어떤 생각'에 잠긴 나는 집으로 돌아와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를 찾아 보았다. 두 영화 모두 나치 치하의 유대인의 고통스러운 삶과 독일군의 잔혹함을 묘사하고 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유대인을 돕는 '선한' 독일인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피아니스트


movie_image (2).jpg▲ 영화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애드리언 브로디, 좌측)과 빌름 호젠벨트(토마스 크레취만, 우측)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바르사바 유대인들의 비참한 삶과 한 피아니스트의 처절한 생존기를 그린다. 이 영화는 유대인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폴란드 국영 라디오 방송국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스필만은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의 눈을 피해 빈 집 다락방에 숨어지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허기에 지친 스필만은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다 독일군 장교에게 발각된다. 그 독일군 장교는 그에게 피아노 연주를 명령하고, 스필만은 마지막 연주가 될 지도 모르는 연주를 시작한다. 이후 독일군 장교는 스필만에게 먹을 것과 입을 옷을 가져다 주며 그의 도피생활을 돕는다. 그렇게 살아남은 스필만은 전쟁 전 여느 때처럼, 마치 전쟁이라고는 겪어보지 못한 듯한 평온한 얼굴로 피아노를 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폐허가 된 집에서 울려퍼지는 쇼팽의 발라드 1번은 내게 타이타닉이 침몰하던 순간 연주되었던 Nearer My God Thee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예술이 전하는 온기에 어루만져지는 느낌.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터에서 스필만의 연주는 독일군 장교 호젠벨트의 정신적 허기를 달래주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가 유대인이었던 스필만을 인간으로 대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모든 독일인들이 유대일을 혐오의 대상으로 취급할 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용기'를 가졌던 호젠벨트에 더 관심이 쏠린 나였다.





쉰들러 리스트

 
movie_image (1).jpg▲ 영화 <쉰들러 리스트>, 아몬 괴트(랄프 파인즈, 좌측)와 쉰들러(리암 니슨, 우측)


여기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러브액츄얼리>, <테이큰>으로 잘 알려진 리암 니슨이 주연을 맡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이다. 이 영화는 독일인 사업가 쉰들러가 나치의 수용소에서 1,100여 명의 유대인을 자신의 군수품 노동자로 고용하여 구해낸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쉰들러는 말한다. "더 구할 수도 있었을거야, 좀 더 살릴 수 있었어. 내가 돈을 좀 더 벌었다면, 내가 덜 낭비했더라면." 그는 1100여 명의 유대인을 살려냈다는 안도감이 아닌 더 구해내지 못했다는 깊은 자책감에 눈물을 흘린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부제: 악의 평범함에 대한 보고서)
한나 아렌트 Hannah Arent


지금까지 두 영화에 등장한 '선인'에 주목했지만,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 관한 것이다. 이 글은 다른 독일인과 군인들은 왜 '호젠벨트'나 '쉰들러'와 같이 '선한' 행동을 하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의문에 하나의 답을 제시해준 한 철학자 그리고 그녀의 책에 관한 이야기를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앞의 몇 단락이 잉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내게 깊은 감동을 준 한나 아렌트 그리고 그녀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데 있어 영화같은 반전을 주고 싶었달까.


114.jpg▲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그녀의 이름은 한나 아렌트. 1906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1924년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철학자 하이데거와 함께 '사유'에 대해 깊이 탐구했다. 그녀는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 모사드에 의해 이스라엘로 잡혀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아돌프 아이히만은 제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및 독일 점령하의 유럽 각지에 있는 유대인의 체포, 강제이주를 계획하고 지휘하였던 독일 나치스 친위대 장교이다). 아렌트는 예정되있던 대학 강의를 취소하고, 미국의 주간잡지 <뉴요커>의 특파원 자격으로 재판에 참관하게 된다. 재판을 모두 지켜본 그녀는 2년 후인 1963년, <뉴요커>에 <전반적인 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다섯 번에 나누어 게재하였고, 이를 모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이라는 책을 세상에 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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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nal-1.jpg▲ 재판장 전경과 유리부스 안의 아이히만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이히만은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중략)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순전한 무사유였다. (중략)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中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악'한 사람이 아니었다. 전례 없는 학살을 저지른 사람치고는 평범했으며,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맡은 바에 충실하고 근면했던 사람이었다. 그것이 아이히만이 예루살렘의 법정에 선 이유였다. 성실한 관료였던 그에게 지켜야만 하는 법이었던 것이 어느 시점(종전)을 기점으로 불법이, 범죄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가 당시의 법을 준수했다고 하여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였다. "완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 아렌트가 그에게 부여한 죄목이다. 그는 생각하는 개인이 아니였으며 자신이 수행했던 최종 해결책(the final solution)과 같은 임무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에 대해 전혀 고민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대인 학살은 그저 상부에서 지시한 '일'에 불과했으며, 때문에 양심의 가책 없이 그 '일'을 실행할 수 있었다. 그곳에 존재했던 모든 독일인들과 독일군들도 마찬가지였다. 

결론은 이렇다. '악'은 결코 악마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으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와 그 파장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엄청난 범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영화 <피아니스트>의 호젠벨트 장교와 <쉰들러 리스트>의 사업가 쉰들러는 그 혼란 속에서도 '사유'하는 개인으로 존재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생각하며 살아야할 의무가 있다. 모든 사람이 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당연하게 행하는 일도 어느 순간 '악'의 모습으로 둔갑할 수 있으며, 또 그 때문에 시대의 죄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자. "나는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생각하는 법조차도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그리고 성실과 근면이라는 그럴듯한 명목 아래 사유해야하는 의무를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가?"





Reference


이미지
네이버 영화 피아니스트 포토 http://bit.ly/1H3tWhP
네이버 영화 쉰들러 리스트 포토 http://bit.ly/1dHkNCX


자료
네이버 영화 피아니스트
네이버 영화 쉰들러 리스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부제: 악의 평범함에 대한 보고서), 한나 아렌트 Hannah Arent 
 

[박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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