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것이 인간인가-예, 아니오로 결정되는 삶의 순간. [문학]

글 입력 2015.06.15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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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생각해 보라. 이것이 인간인지.
빵 반쪽을 위해 싸우고 예, 아니오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죽어가는 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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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과 인간은 어떻게 다른 걸까요? 끔찍한 대량학살의 현장에서 살아 돌아온 이에게, 그 질문과 답은 너무나 절실합니다. 인간을 인간이라고 부르려면 인간은 어떠해야 하는 건가요? 사람이 사람을 살육하는 지옥에서 살아남은 자에게, 그 질문을 유령처럼 곁을 떠나지 않고 수십 년을 괴롭힙니다. 끝내는 스스로 목숨을 다하는 작가.
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요? 세상엔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과 인간이 아닌 듯한 이상적인 인간들이 공존합니다. 비록 시대가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 모두를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작가 프리모 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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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태어나, 토리노대학 화학과를 졸업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 파시즘에 저항하는 지하운동 참여 중 체포돼 아우슈비츠로 이송, 제3수용소에서 지냈으며, 1945년 아우슈비츠에서 풀려났다. 토리노로 돌아와 1977년까지 니스 공장에서 관리자로 일하며 작품들을 발표했고, 1987년 토리노의 자택에서 돌연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휴전』으로 제1회 '캄피엘로상'을 『멍키스패너로』 '스트레가상'을, 『지금이 아니면 언제?』로 1982년 '비아레조상'과 '캄피엘로상'을 수상했으며, 그 외의 작품으로는 『익사한 자와 구호된 자』, 『주기율표』 등이 있다.





삶을 살아가는 방법, 생존에 대해서. 


아우슈비츠!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감옥에서 생존했던 프리모 레비가 그의 경험담을 기록한 책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건으로 기록되는 나치의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작가, 프리모 레비의 이야기는 너무나 막연한 ‘삶’, 특히 ‘생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책 한장 한장의 무게가 너무 무거웠던 책이다. 빛과 어둠, 때로는 어둠을 직시하는 것이 그만큼 밝은 빛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 철저하게 패배해 나가는 인간들, 생존, 오로지 살아남는 것에 몰입해 나가는 여러 인간 군상들. 생존자로써 자신의 인간성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던 기억을 들추는 것도 잔혹한 일인데, 그런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우리에게 무엇인가 남겨주고 싶었던 저자의 마음이 절절한 묘사로 가슴이 먹먹하고 눈이 뜨거워지는 순간이 많았다. 한 인간의 엄청난 기억과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진 기록인 만큼 독자의 마음을 제대로 울렁이게 했던 책이다.

 프리모의 각 파트들은 큰 울림들을 전달했다. 그 중에서 생존을 위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첫째, 가스실로 보내진 한 유대인의 이야기였다. 가스실로 보내는 인원들에게 2배의 죽이 배급이 된다. '치글러'라는 유대인은 노동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스실로 보내지게 된다. 그는 다음날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다. 그날 저녁 배급시간 배급인은 이 사람이 너무 튼튼해 보였는지 다른 사람과 같은 양의 죽을 주게 된다. 치글러는 자신이 두 배의 죽을 받을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고 담당자의 확인을 거쳐 정확히 '두 배'의 죽을 받게 된다. 그는 마지막 죽을 먹으러 조용히 침대로 가는 태연함을 보인다. 생존을 위한 방법은 크게 보면 그처럼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조용히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득을 챙기는 것이다.
 선발. 그들의 말로 ‘셀렉챠.’삶과 죽음을 가르는 선발이다. 포로들을 둘 곳이 없자 포로의 수를 줄이기 위해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포로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선발되어 가스실로 보내진다. ‘나는 선발될 것이고 너는 제외될 것이다.’라는 식의 뻔뻔한 대화들을 하면서도 ‘그래도 나는 아니겠지’라는 생각을 가진 그들을 보며 우리의 자화상이 느껴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누가 더 못난 상황인지에 대해 자랑하면서도 막상 타인보다는 자신이 더 좋길 바라는 심리를 말이다. 학업에서도 취업에서도 심지어 생계에 관해서 그렇게 떠들어 댄다. 타인의 운명에 대해 판결을 내릴 정도로 자신의 운명에 대해 확신을 가진 사람도 없다. 생존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영원한 죽음이 있는 것이다. 라캉의 이론에 따르면 욕망도식에서 나오는 ‘대상a’인 소망은 주체인 욕구와 절대 만나지 않는다. 이를 생존에 비유하면 생존하기 위해 대상a를 끊임없이 채우지만, 채울수록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 영원한 욕망충족에는 오직 죽거나, 미치거나, 해탈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그는 불가피한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생존의 극단적 사례는 자신의 소멸로서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가장 반대적인 ‘죽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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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선발'의 장면
예, 아니오로 결정되는 삶의 순간

 둘째, 수용소의 사회에서는 미치광이만 살아남는다. 수용소에서는 정신병자도 범죄자도 없기 때문이다. 엔지니어인 알프레드 L은 자신을 다른 해프틀링과 ‘차이’를 유지하려고 했다. L은 더럽고 추악한 포로들 사이에서 ‘특권층’의 외모와 매너를 유지하며 특권층이 되어 갔다. 엘리아스라는 자는 키는 작았지만 체구가 단단한 사람이다. 그는 자연스럽고 천진난만한 도둑이었으며 누구보다 상황을 잘 적응해 나갔다. 여기서, 두려운 존재는 그 자체로 생존 후보자이다. 생존자들은 특별히 잔인하고 가혹하고 비인간적인 사람들이었다. 사회에서의 생존방법이 뭘까. 내게는 과연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는 무기가 있는 걸까. 이런 상황에서는 결코 평범한 게 좋은 것이 아니란 것을 인식하며 그들의 생존 방법을 찾아낸 것에 대해 경의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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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에서 가장 유리한 것은 어찌되었든, 자기 자신의 특성을 잘 아는 것이다. 누구는 자신의 도벽을 잘 알고서 이를 잘 활용하고 다른 누구는 동정심을 이용해 먹고 살 줄 알며 또 다른 누구는 권력관계와 위엄을 이용해서 남들과 차별을 두어 강자로 군림한다. 
어릴 적,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고 싶으면 삼국지를 최소한 10번을 읽어보라는 말을 들었다. 삼국지에도 제갈공명과 유비, 영포 등 무수히 많은 영웅들이 자신의 계략을 짜지만, 여기 이 수용소에서의 삶은 격식 없는 전쟁인 것이다. 대업이라고 할 것 없이, 인간의 원초적 본능, 생존만을 위해 투쟁하는 악을 쓰는 어린 짐승들만이 자신의 간사하고 교활한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살아간다. 딱 그 모습만 남아 있는 것이다.
 나이, 사회적 지위, 출신, 언어, 문화와 습관이 전혀 다른 수천 명의 개인이 철조망 안에 갇힌다. 그곳에서 그들은 규칙적으로 되풀이되고 통제당하는, 만인에게 동등한 삶, 그 어떤 욕구도 충족되지 않는 삶에 종속된다. 이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인 인간이라는 동물이 행동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실험장이다. 그들이 살아남는 지혜는 이해하지 않는 것, 미래를 상상하지 않는 것, 무엇이 어떻게 언제 끝날지 생각하며 괴로워 말 것, 남에게 질문하지도 자문하지도 말 것 이었다. 이 곳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감정에 무딘 것이 필요했다. 작가는 아마도 정상적 상태에서 당시의 생존을 위한 비정상적 일을 떠올리며 기록하는 것 자체가 고통일 수 있었다. 어쩌면 작가가 돌연한 자살의 이유는 아우슈비츠의 제 3수용소에서 지낸 말 못할 나날들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이야기에 걸친 핵심어를 꼽자면, ‘희망’이라는 생각이다. 희망은 그들에게 사치였다. 작가의 말대로 아우슈비츠에서 ‘희망’을 감히 품으면 안 되었다. 이는 몸이 척박하고 어두운 생활을 견디어 내는데 무척이나 무거운 짐이었다. 짐이라기보다 오히려 자신을 짓누르는 살상무기에 가까웠다. 그들은 ‘삶’보다는 ‘죽음’을 택하고 생각하는데 익숙해져야 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스쳐가는 일상이 무척 고마워졌다. 그리고 정말 자세히 묘사한 그들의 인간 같지 않은 생활을 내 일상에서 스쳐가며 떠올리고는 한다. 가령 내 포근한 침대를 보며 작가의 딱딱하고 좁은 75cm폭의 침대에서 두 사람이 어떻게 잤을까를 떠올리기도 한다. 그것도 거적 하나를 덮고서. 이들의 삶은 인류 전체에 있어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이라 생각한다. 삶의 본능인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가 어떻게 맞물리며 돌아가는지 역시 당시의 상황을 통해 우리는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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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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