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괜찮은 사랑일까, 그녀들의 처절한 몸부림

글 입력 2015.05.31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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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사랑일까, 그녀들의 처절한 몸부림

 유독 이 연극을 보고나서 잊혀지지 않는 대사가 있다.

 “ 지금부터가 시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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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머리 속에 이 문장은 희망차고 밝은 느낌만을 가지고 있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녀들의 집’을 들여다 본 후 이 말은 이제 더 이상 
긍정적인 한 면만을 가진 문장이 아님을 안다.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독재적으로 행동하는 아버지와
 한 지붕에서 살아 온 세 자매는 성인이 된 후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 마음 속 깊이 박힌 상처가 트라우마로 남아 인생을 지배한다는 이야기가
 ‘그녀들의 집’ 의 줄거리쯤 될 것이다.

노희경 작가의 작품 ‘괜찮아 사랑이야’ 에서 의붓아버지에 대한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성장 후에도 지독한 병을 앓는 ‘재열’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연극을 보면서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 아래서 자란 아이라는 것이 
세 자매와 유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재열’의 대사가 떠올랐다.

사막에서는 밤에 낙타를 나무에 묶어 둬.

그리고는 아침에 끈을 풀어 놓지, 그래도 낙타는 달아나지 않아.

묶여있다는 것을 기억하거든.

상처가 우리 발목을 잡아 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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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으로 화장실에서 잠을 자지 않으면 
수면을 취할 수 없는 트라우마가 있는 재열과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괴로운 삶을
 살아온 세 자매가 어떻게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 부모님 세대까지만 해도 가부장적인 집안, 
그리고 그런 아버지는 당연하고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환경일 뿐이었다. 
그 아래 자란 아이가 정신적인 후유증이나 트라우마를 갖게 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잘 이겨내지 못한 아이의 잘못으로 보는 것이다.
유교라는 위계질서가 강한 문화를 가지고 살아 온 우리의 많은 가정들이 
오랜 시간 반복해 온 문제 중 하나임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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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도 그런 관점에서의 주장에 일부가 아닐까.
세 자매는 이 연극에서 제우스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완벽한 여자도 남자도 아닌 그 중간 쯤의 아프로디테, 아테네, 헤라로 비유된다. 
각각의 성격이 세 자매와 비슷하리만큼 닮아 있는데, 아버지의 말을 무조건 수용하고 
우아했던 어머니의 모습과 가장 닮은 첫째 딸은 자궁을 들어내면서 이혼을 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다. 

둘째 딸은 남자아이처럼 씩씩하고, 한편으로는 셋 중 가장 무식하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인정 받고 싶은 심리 때문에 40살이 다 되도록 
아버지의 병수발을 드는 안쓰러운 인물이기도 하다. 

막내 딸은 연극을 보는 동안 가장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인물이다. 
두 언니는 막내의 외모 때문에 막내가 자신들 보다 편하고
더 좋은 환경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고 질투하지만,
막내의 삶을 천천히 되돌려 보면 어느 한 부분도 그녀가 다른 두 언니보다 행복한 대목은 없다.
그것은 단지 보는 사람의 편견일 뿐.


이 연극을 본 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 중 두 가지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어릴 때 받은 트라우마는 개인의 노력에 따라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 것.

두 번째는 우리가 보는 남의 삶은 오직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 이다.

첫 번째 편견에 대해 다시 고찰해 보려고 한다. 
나는 개인의 의지만 있으면 어떤 어릴 적 상처도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치유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주변의 사람들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심리적 문제이므로 그 스스로가 노력하기만 하면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세 자매의 삶을 생각해 본다면,
이는 섣부른 판단임을 알 수 있다. 그녀들은 스스로 해결하고, 
극복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에 상처를 받았다. 
누군가는 정신적인 상처를 누군가는 물리적인 상처를 말이다.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 가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언제 누구에게 받았느냐가 핵심인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가 평생 지속되어야 할 
관계 속에  생긴 인물이라면 그 트라우마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가 되어버린다. 우리는 결코 남의 트라우마나 상처에 대해 쉽게 얘기하고 그를 비난 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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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내가 다시 생각하게 한 편견은 
우리가 보는 타인의 삶을 완전하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쉽게 그리고 자주 이런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연예인들의 삶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 스캔들에 빠지면 저 사람은 고작 저런 사람일 거라고 단정짓는 우리의 태도 말이다. 
전체는 일부가 될 수 있지만, 일부는 전체가 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자기 자신을 다 아는 것도 평생에 걸친 숙제인데, 타인의 삶을 일부만 보고 어떻게
 저것이 전부라고 확신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단지 스스로를 위해 하는 자기 합리화의 일종일 뿐이다. 
셋째의 삶을 부러워 했던 둘째도 어쩌면 영원히 셋째를 미워하고 질투하며 
자신의 합리화를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트라우마 없이는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열심히 살아 갈수록 더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고 
없었던 트라우마도 무한대로 생겨난다. 
럴 때 우리는 세 자매의 아버지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 일깨워야 한다. 
우리의 가벼운 말이나 편견이 또 누군가에게는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세 자매가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상태로 끝난 연극처럼, 
우리의 삶도 갈수록 생기를 잃어갈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그림자가 존재하는 한 말이다. 
이제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주지 않도록 
가벼운 편견과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거두어야 할 것이다.


[서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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