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 파리넬리, 날 울게 하소서 [공연예술]

글 입력 2015.05.08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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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내 안에 눈물 만들어 내 맘 아플 때 
나 울게 하소서



뮤지컬 <파리넬리> 



※카스트라토 : 변성기 전에 고환 제거 수술을 받은 남성 소프라노 가수. 여성의 음역을 소화할 수 있다.





 “모든 교회 공동체의 집회에서 여자들은 침묵해야 한다.”라는 성서의 기록으로 여성들의 성가대·오페라 활동이 철저히 금지되었던, 교회와 오페라가 오로지 남성의 영역이었던 중세와 르네상스. 그러나 남성의 낮고 중후한 목소리만으로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어려웠고, 여성의 음역인 고음의 미성이 필요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결국 16세기, ‘신을 위해’라는 미명 아래 카스트라토라는 잔인한 비극이 탄생하고 말았다.
 성공한 카스트라토는 지금의 팝스타와도 같은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기에, 가난한 집안에서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너도나도 아이들의 고환을 잘라냈다. 그러나 그들이 치루는 대가는 가혹했다. 손발이 지나치게 커지는 등의 비정상적인 발육을 겪어야 했고, 잘못되어 평생 불구로 사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성으로서의 삶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다. 그럼에도 거의 대부분의 카스트라토들은 평생 무대에 한 번 서보지도 못한 채 불행한 삶을 살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 했고, 극소수만이 성공하여 이름을 날렸다. 
 그 극소수,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쥐었던 그들이라면, 행복했을까? ...
 

지난 5월 1일, 18세기 유럽을 뒤흔든 가장 성공한 카스트라토 ‘파리넬리’의 삶을 눈물로 엿보았다.


파리넬리 포스터1.png
파리넬리 시놉시스.png


  정말 좋은 뮤지컬을 만났다는 생각을 했다. 넘버, 배우, 앙상블, 캐릭터, 의상, 연출까지 어느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머릿 속에 샘솟는 생각이 너무 많았고 다 정리하기가 어려웠다. 아직 가시지 않은 여운 탓에 두서가 없을까 염려되지만, 이 마음을 그대로 전할 수만 있다면...


 파리넬리의 넘버들은 한 곡 한 곡 모두 주옥같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울게 하소서'는 단언코 파리넬리의 절정이다.
 



슬픔 내 안에 눈물 만들어 내 맘 아플 때 
날 울게 하소서

 파리넬리가 안젤로를 바라보며 부르는 처음 부분은 위처럼 번안되어 나온다. 개인적으로 외국어로 된 넘버를 번안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음율이라든지, 작사가가 의도한 고유의 감성이 훼손되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울게 하소서의 번안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는 생각이 든다. 카를로가 평생 품고 있던 한이 느껴지면서도, 한탄과 원망이 아닌 절제된 슬픔을 잔잔하게 비춰서 더 깊숙이 빠져들게 한다. 거기에 그 슬픔 속에서도 바래지 않은 따스함으로 안젤로를 위로하는 그의 표정과 목소리가 더해지면, 가슴 속에 눈물이 물결치는 것만 같다. 그 뒤는 원곡 그대로 나오는데, 헨델의 노래가 아니라 파리넬리 자신의 외침처럼 그의 한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Lascia ch'io pianga
나를 울게 내버려 두소서
Mia cruda sorte
비참한 운명이여
E che sospiri la liberta!
잃어버린 자유에 나 한탄하네
E che sospiri
나 한탄하네
E che sospiri la liberta!
잃어버린 자유에 나 한탄하네
Lascia ch'io pianga
나를 울게 내버려 두소서
Mia cruda sorte
비참한 운명이여
E che sospiri la liberta!
잃어버린 자유에 나 한탄하네
Il duolo infranga queste ritorte de'miei martiri
이 비애가 내 고통의 사슬을 끊게 해 주소서
Sol per pieta
제발 자비로서
De'miei martiri
나의 고통을...
Sol per pieta 
제발 자비로
...
<후략>


왜하필.png▲ 고유진 배우의 '왜 하필'.


 다음으로 인상 깊었던 넘버는 ‘악몽’과 ‘왜 하필’이다. 거세당한 이후 제대로 잠들 수 없는 카를로. 늘 똑같은 리카르도의 음악에 실망해 더 이상 형의 노래를 부르지 않을 거라고 소리치며 외로이 침대에 누운 그에게, 악몽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의 남성을 잘라내던 이발사들이 소리친다.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 목소리가 없으면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를 카스트라토로 만든 것도 그의 목소리,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도 그의 목소리.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노래를 포기할 수조차 없는 그의 마음은 얼마나 비참했을까? 노래하지 않으면 가수도, 여자도 남자도 아닌 쓸모없는 존재.. 가혹한 운명에 그는 또 한 번 절규한다. 

 신이 내린 목소리? 신이 선택한 목소리? 왜 하필 나인가!
 사람들은 내 목소리에서 천국을 엿보지만, 나는 매일을 지옥에서 산다네.

이 처절한 절규조차, 천상의 목소리로 울려 퍼진다.


파리넬리 주요캐스팅.png▲ 파리넬리 주요 캐스팅.


 넘버 뿐이 아니다. 캐릭터들도 하나같이 매력적인데다 캐스팅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입체적이고 복합적이었던 파리넬리와 리카르도, 그리고 이들을 연기한 루이스 초이, 이준혁 배우가 마음을 끌었다. 사실 파리넬리 역을 맡은 루이스 초이가 노래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카운터 테너라도 진짜 카스트라토가 아닌데 파리넬리를 재연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달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무대에 등장하고 처음으로 입을 떼었을 때, 소름이 쫙 끼쳤다. 남자의 입에서 그렇게 높고 맑은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해보지 못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는 카운터 테너 중에서도 얼마 없는 소프라노라고 했다. 높고 맑은 목소리, 화려한 기교, 그 시대에 어울리는 성악 발성. 그야말로 파리넬리를 재연하는 데에 꼭 알맞은 배우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파리넬리.png▲ 루이스 초이의  파리넬리.


 목소리 뿐 아니라 연기도 훌륭했다. 파리넬리는 오만함과 연약함, 사랑과 미움, 열정과 증오가 교차하는 이중적인 캐릭터다. 천재적인 재능은 그를 오만할 수밖에 없게 했으나, 그 날의 상처와 남성성의 상실은 평생 여물지 못할 연약함을 안겨주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평생 그를 돌보고 함께하며 그를 위해 작곡하는 형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작곡 공부를 위해 그의 거세에 일조했고 영혼 없는 노래만 작곡하며 늘 그의 명성 뒤에 숨어살려는 형을 또한 미워한다. 더 좋은 노래를 부르기를 열망하고 노래에 의해 위로받지만, 동시에 자신을 카스트라토로 만든 노래를 저주한다. 루이스 초이는 이를 자신만의 빛깔로 풍부하게 표현해냈다. 오만한 천재에 어울리는 차가운 눈매, 그러나 그 눈빛에서 흔들리는 불안과 절망. 형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며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경멸을 숨기지 않는 매정함. 고통스럽게 노래하지만 거기에서 얻는 위안의 스쳐감. 거기에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그는 보는 이로 하여금 보듬어 주고 싶어 견딜 수 없게 한다.

 파리넬리가 처절한 천재의 숙명으로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리카르도는 완전히 반대다. 사실 뮤지컬 파리넬리는 뮤지컬 ‘리카르도’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리카르도의 비중이 크고 중요하다. 파리넬리의 삶에 절대적이었던 존재이자 파리넬리가 삶에 절대적이었던 리카르도. 그는 작정하고 매력적인 카를로에 반해 찌질(?)하고 한심한 면이 많아 잘못하면 반감을 사기에 충분한 캐릭터다. 실제로 그는 여자와 도박에 빠져 전 재산을 다 잃고 래리펀치에게 동생을 저당 잡히며, 오페라를 쓰지 못해 헨델의 악보를 훔치고, 안젤로의 비밀을 이용해 헨델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하는 카를로를 협박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단순히 글로만 나열해 놓으면 그는 천하의 몹쓸 놈처럼 보인다.


리카르도.png▲ 안준혁 배우의 리카르도. 천재인 동생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평범한 형.


 그러나... 도무지 그를 미워할 수가 없다. 동생의 천재성에 평생을 열등감에 시달리는 범재(凡才), 그럼에도 동생을 사랑하는 형, 그러나 비뚤어진 집착으로 변해버린 사랑. 그는 성인군자가 아닌 지극히 평범해빠진 한 인간이었고, 나 역시 그렇기에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생의 곁에서 너덜너덜하게 닳아버린 그의 마음이 보였다. 동생에게 친근한 듯 대하지만 어딘가 편치 못한 태도와 늘 불안한 듯 갈피를 잡기 어려운 눈동자, 아직 어린 시절에 머물러있는 것 같지만 광기어린 목소리에서 전부. 이준혁 배우의 리카르도는 그랬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모든 감정을 하나로 응축한 대사는 그가 카를로를 해치려는 래리펀치를 죽일 때 외치는 대사다. '내 동생한테 손 대지마!'라는, 눈물 젖은 대사. 그의 모든 감정들이 마지막으로 가리킨 곳은, 동생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이다. 결국 서로의 행복을 위해 각자의 길을 찾아 헤어지지만, 그들의 마음을 찢어발기던 해묵은 애증은 마침내 청산되지 않았을까.

 그밖에 안젤로를 연기한 시원시원하고 애상적인 목소리의 안유진 배우, 익살스러우면서 비정한 연기가 래리펀치에 정말 잘 어울렸던 원종환 배우, 웅장한 목소리로 관객들의 마음을 흔든 김호섭 배우도 모두 좋았다. 그리고 언급하지 않고 지나갈 수 없는 또 하나의 포인트가 있으니, 바로 앙상블! 모든 리뷰에 앙상블이 좋았다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할 만큼 파리넬리의 앙상블은 약방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했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오페라 대결을 알리는 ‘호외요!’ 파리넬리만의 독특한 액자 장치에 숨어 번갈아가며 고개를 쏙 빼고 호외요!를 외치는 장면은 정말 귀여워서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이 외에도 이발소, 공연장, 악몽, 도박장 등 다양한 장면에서 아름다운 중창과 안무, 섬세한 표현과 연기로 극의 퀄리티를 최고로 끌어올리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호외요.png▲ 김재복 앙상블의 깜찍한 '호외요!'


 어렵지만 아쉬웠던 점을 꼽으라면 안젤로와 헨델의 캐릭터가 좀 평면적이었다는 것이다. 가상의 인물로 설정된 안젤로는 카를로와 리카르도 다음으로 중요한 주연이고, 파리넬리의 아픔을 이해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저 여자로서 카스트라토로 살아야하는 자신의 운명을 슬퍼할 뿐, 카를로나 리카르도처럼 복합적인 정서의 충돌이라든지 깊은 내면의 표출은 보기 어려웠다. 헨델도 마찬가지다. 이 극을 보고 난 후 영화 '파리넬리'를 보았었다. 그런데 영화 속의 헨델은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부심, 파리넬리에 대한 증오와 경외, 리카르도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는 대단히 임팩트 있는 캐릭터인 반면, 뮤지컬 속 헨델은 오직 자신의 오페라가 성공적이기를 바랄 뿐 그의 음악에 대한 가치관이라든지 열정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두 인물이 조금 더 입체적이고 복잡한 캐릭터였다면 한층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파리넬리 속의 헨델.png▲ 영화 '파리넬리' 속의 헨델. 거만하고 당당한 눈빛이 자신의 음악에 대한 자부심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파리넬리의 캐릭터에서도 조금 더 보여줬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개인적인 상상이지만, 카를로 역시 형에게 열등감을 가졌을 것 같다. 그는 정상적인 남자로서 살아갈 수가 없었으니까. 자신의 명성에 몰린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이 여자 저 여자 안고 다니는 형을 그는 어떤 마음으로 보았을까. 그에게 매달리는 여자들에게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그의 외로움의 깊이란 어디까지였을까. 그의 그런 터질듯 미묘한 감정까지 다 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뮤지컬 파리넬리. 너무나 다양한 감정들을 가슴 벅차도록 맛보게 해줬고, 아직도 떠나지 않는 울림을 선사해 준 멋진 공연이었다.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적인 운명, 그 속에 휘몰아치는 인간의 고통과 사랑.. 촉촉한 공연을 또 하나 가슴에 담을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오랫동안 놓을 수 없었던 리뷰를 마친다.



서포터즈4기_최민희님.jpg






*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qlsrjt59/220354460951
http://blog.naver.com/moraeni/220343536768
http://blog.naver.com/jobanseok/220252234031
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430300641895536016


[최민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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