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 몹시 차가운 따뜻한.

글 입력 2015.03.29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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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보다 외로운 인간들을 위한 레퀴엠
(황정은의 소설 중심으로)
서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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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정할수록 확실해지는 것들
     공유는 많지만 공감은 적은 세상이다.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은 갈수록 편해졌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고독한 순간들을 마주하는 세상이다. 혹 누군가는 그런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자조적인 말들을 쏟아내기도 한다. 그것뿐이랴. 풍족한 것들은 더욱 더 가난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가난이 겨울과 만나면 인간을 더없이 나약하게 만든다. 그래서 추운 우리의 세상에서 그 세상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우리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 뿐이다.
그림자가 일어났다고 말하자 여 씨 아저씨는 눈을 깜박였다.
그래서 어떻게 했나.
따라갔어요. / 따라갔나.
조금 따라갔어요. / 따라가지 말았어야지.
그러지 않으려고요.
암.                                                                                                      -百의 그림자(30~31쪽)-
    황정은의 소설 '百의 그림자(2009년 作)'는 그림자가 일어서는 것을 처음 목격했다는 화자 은교와 이를 심각하게 바라보는 여씨 아저씨와의 대화가 등장한다. '그림자가 일어선다'는 것은 곧 주체와 그 주체를 통해 생겨난 그림자 사이에 분열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때, 그 주체가 사람이라면 원래의 위치를 벗어나는 그림자의 변화는 사물일 때보다 더 극심한 변화를 가져온다. 사람이란 생명 혹은 혼 따위를 가진 무형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생겨난 그림자가 근본의 모습을 따르지 않고 변화한다는 것은 사람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여 씨 아저씨가 은교의 말에  직감적으로 느낀 그림자의 변화는 곧  '삶의 부정'임을 인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후, 여 씨 아저씨는 그림자를 자꾸 따라가게 되더라는 은교의 말에 '그게 무서운 거지, 사람이 맥을 놓고 있다보면 맹추가 되니까, 그 때를 노려 덮치는 거야' 라는 대사를 통해 그 또한 이를 경험 한 적이 있는 (사실은 여러 번 있는) 인물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삶에 대한 무기력함 혹은 자조를 표현하는 작품은 이 뿐만이 아니다. '마더(2005년 作)' 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티파니'(공동 죽음 사이트 가입자)들은 함께 죽음을 맞이하자는 취지로 모인 집단이다. 그들은 매주 투표를 통해 죽음과 삶을 결정하는데, 한 사람이라도 살기를 원한다면(YES), 그  주는  모두 살아가야만 한다. 화자인 '오'도 티파니 중 한 명이다. 그는 현실이 성가시고 불편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YES 혹은 NO로 결정되는 인생에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다시 산다면 어쩔 것인가.
나는 또 한 번의 일생을 두려워하고 있다. (...중략...)다시 일생이 어떨 것인가 내일이라도 이 장막 안에 나타날 인간은 또 어떨 것인가 생각하며 어디까지나 비천하게 걱정하고 있다.
猫生 십오 년, 이름은 몸.
일생이 곧 끝날 것이다.                                                                  -猫氏生(286쪽)-
    고양이의 시점에서 인간 세상을 바라보는 작품 '猫氏生(2011년 作)'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삶과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다섯 번 죽고 다섯 번 살아났다는 고양이의 첫 마디로 시작되는 이 단편소설은 소설이 끝날 때 까지 일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지듯 마무리 된다. 그렇다면 황정은은 이 세 작품들을 통해 삶의 허무함을 혹은 무의미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녀의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었다면 '그렇다'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삶을 부정 할수록, 삶에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냐는 화자들의 허무함이 느껴질 수록, 독자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한 역설이다. 그러나 작가가 이미 답을 알려준 역설이다.  먼저 '百의 그림자'를 생각해 보자. 그림자가 일어서는 걸 보았다는 은교는 처음 그림자가 일어난 것을 보고 타인의 아무런 개입없이 그 속에 빠져들 뻔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림자와의 사건 이후 무재씨, 여 씨 아저씨, 전구가게 노인 등 주변 인물들을 통해 그림자를 내버려두고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는 그림

자를 따라가지 말라는 여 씨 아저씨의 조언이나 첫 장면과 달리 또 다시 그림자가 일어서는 모습을 본 은
교에게 무재씨가 '노래할까요' 하며 그녀를 편안하게 해주려 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결국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던 그녀는 계속해서 삶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마더'에서도  화자 '오'는 결국 마지막까지 티파니의 투표때 마다 알 수 없는 어떤 티파니들의 선택(YES)으로 죽음으로 부터 삶을 유지한다. 일생이 곧 끝날 것이라 자조하던 '猫氏生'의 고양이 마저 다가오는 삶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끝없이 부활하는 삶의 연속을 기대한다. 심지어 인간들에 의해 배를 갈라 내장이 잘려나가도 마침내 눈을 뜨고 바라보는 세상을 끊임없이 관찰한다. 이런 그들에게 진정으로 '삶'은 부정적인 것일까. 비참한 삶이라 부정할 수록 더욱 명확해지는 '삶의 의미'는 더욱 더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2. 윤리적인 무지-1인칭 화자가 바라 본 주변 인물 중심으로
     무지는 나쁜 것인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유식함을 드러내기 위한 수 많은 대화들 속에서 무지는 부끄러운 것, 감춰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타산적인 대화들은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매우 가치있는 것임을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들 뿐이다. 그러면서도 무지한 말을 내뱉는 사람에게 무언의 조롱을 쏟아 붓는다. '전구가게 노인(百의 그림자)'을 처음 보면서 나도 그랬다. 이 노인은 '오무사' 라는 작은 전구가게를 운영하는데 전구를 사러오는 사람들에게 항상 한 개의 전구를 더 넣어 준다.
    오무사라고, 할아버지가 전구를 파는 가게인데요. 한 개에 이십 원, 오십 원, 백 원가량 하는, 전자 제품에 들어가는 조그만 전구들이거든요. 오무사에서 이런 전구를 사고 보면 반드시 한 개가 더 들어 있어요.
   잘못 세는 것은 아닐까요?                                            -百의 그림자(94쪽)-
   우리는 윤리적인 무지를 처음 마주하면 경계한다. 혹시 그 무지가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 '무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 말이다. 그래서 '잘못 세는 것은 아닐까요' 라고 묻는 무재의 말은 당

연한 걸지도 모른다. 그러자 은교는 '가지고 가는 길에 깨질 수도 있고, 불량품도 있을 수 있는데, 손님
더러 왔다 갔다 하지 말라고 한 개를 더 넣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마트에서 주는 원 플러스 원과는 느낌이 다르다'고도 덧붙인다. 노인이 주는 그 전구 하나는 배려인 것이다. 猫氏生에서도 윤리적인 무지를 나약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있다. 바로 '곡 씨 노인'. 그는 가난하고, 무기력하다. 음식은 남이 버린 것을 주워다가 먹곤 한다. 화자인 고양이는 그의 곁에 맴돌면서 그의 하루를 바라보는데 주로 곡 씨 노인이 장사하는 사람들로부터 협박을 당하거나, 주변 이웃들로부터 무시당하는 모습들을 목격한다. 그는 사회에서 '무지하고 무기력한' 사람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유일하게 주인공 길 고양이를 챙겨주는 인물이다. 고양이의 입장에서는 가장 인간적인 인물인 것이다. 그런 그를 우리는 무지하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 것인가. 원래 착한 심성을 타고 났다고 해도, 그는 윤리적이다. 같은 환경에서 그보다 경제적 우위를 갖춘 이들도 쉽게 외면하는 현실이기에 우리는 더욱 더 곡 씨 노인에게서 '윤리적인 무지'를 느끼게 된다.  남들과 비교하고, 그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려는 현대인에게 '무지'란 죽음에 가깝다. 배려는 사치이고 '이기적임'이 타당하게 받아들여 지는 순간들을 마주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식함을 무기로 행복함을 성취할 수 있을까. 사실 현대인들 중에 위의 작품들에 등장한 '전구가게 노인'보다, '곡 씨 노인'보다 분명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그들은 분명 하층민의 삶을 살고 있지만 부족함이 많으면서도 인간의 본연함, 윤리성을 잃지 않은 인물들이다.
     황정은의 소설이 등단한 2005년부터 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 계속 좋은 작품들로 고려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뿐만 아니라 갈수록 의미를 상실해가는 '윤리적인 무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윤리적 무지를 갖춘 인물들은 1인칭 화자라기 보다 그들이 바라보는 주변 인물에 포진되어 있어 독자로 하여금 한 번쯤은 '나는 어떠한가'에 대해 성찰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 이것이 황정은 소설에 등장하는 1인칭 화자들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3. 공간에 대한 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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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지금만 한 장소를 찾아내기도 어렵다고나 할까, 막상 거길 나와 부근에 다른 장소를 얻으려니 두 평 세 평일 뿐인 본래의 공간이 아쉬울 뿐이라고나 할까. (...중략...) 외곽으로 나가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없고.
찾을 수 있을 거에요.
그럴까요?/다들 그렇게 하잖아요.
... / 조용하네요.
네./ 예쁘네요.
예쁘지만, 이상한 기분이 드네요, 라며 무재 씨는 물끄러미 공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百의 그림자(116~117쪽)-
     황정은 소설에는 특히나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철물점 건물이 가,나,다 동으로 나누어져있고 각 각의 동이 어떤 가게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자세하게 소개하는 부분이나 '가 동'을 철거한 뒤 조성된 공원을 바라보며 쓸쓸한 심정을 드러내는 부분(위의 인용) 등을 보면 확신할 수 있다. '猫氏生'의 화자인 고양이도 노인이 이사한 후에 계속 그 전에 살았던 옥탑방 집을 그리워하며, 주인이 바뀌어도 한 두차례 그 집에서 서성거린다. 공간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세상은 인간과 인간이 존재하는 공간의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결국 공간이 있어야만 인간이 존재함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우리는 공간을 '터전' 이라 부르지 않는다. 필요여부에 의해 그 공간은 소유자뿐만 아니라 타인에 의해 언제든지 붕괴되고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은교가 일하는 철물점 가, 나, 다 동은 사회적으로 얼마나 가치가 있는 건물인가를 수시로 평가받아야 한다. 물론  이익을 낼 수 없는 건물이라 여겨질 때에는 철물점 가 동과 같이 아주 짧은 사이에 언제 있었냐는듯이 철거된다(百의 그림자). 그런데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오랜 시간 그 공간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상태이다. 공간은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그 안정감은 오랜 시간이 지날수록 두터워 지는 것이 본래 성질이다. 그런데 여차여차한 이유로 철거 위기에 놓인 자신의 공간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떤 심정일까. '난쟁이가 쏘아 올린 공' 처럼 철거당하는 집에서 늘 그래왔듯이 꿋꿋이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일까. '百의 그림자'에서는 가 동이 철거되었음을 알려줄 뿐, 철거민들의 이야기는 전해주지 않는다. 다만 전구가게 노인도 '오무사'가 철거 당함으로 인해 어디로 사라지고, 노인의 늘어나는 그림자를 본 것 같다고 말한다. 자신을 돌봐주던 노인이 떠난 옥탑방 집을 서성거리는 고양이도 마찬가지다(猫氏生). 그곳은 이제 타인의 공기로 가득 차 있어 그들이 그 곳에 살았던 흔적들을 모두 지웠지만 고양이는 분명 그곳을 그리워 한다. 노인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이 애정을 쏟았던 공간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할 줄 안다. 그러나 차가운 현실은 이를 고려할 여력이 없어 보인다. 가 동이 본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는 것도 한 순간이고 그 공간에 원래 있었다는 듯 한, 그래서 그 푸르름이 더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공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사람들의 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공원이지만 어째 어느 누구도 위로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보면 논과 밭, 혹은 누군가의 애정이 담긴 공간들이 아주 빠르게 붕괴되고 변화하는 것을 종종 목격한다. 그리고 그 곳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우리 동네 집 값이 올라갈 거라는 등의 차가운 말들이 오가는 공간들만 있을 뿐이다. 더 이상 인간의 공간에 대한 애정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4. 몹시 차가운 따뜻함.
    처음 황정은의 소설을 읽고 나서, 한 동안 책갈피에 그려진 그녀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 본 기억이 있다. 무표정 속에서 어떻게 저런 차가움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녀의 소설은  '몹시 차가운 따뜻함' 이 있다. 연민으로 시작해 이내 공허함으로 흘러버리는 대부분의 화자들과 주변 인물들의 모습은 언뜻 보면 세상에 대한 자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소설을 다시 찾게 되는 이유는 그 쓸쓸함과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고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따뜻함'이 계속해서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猫氏生'의 고양이가 그랬고, '마더'의 '오'가 그랬다. '百의 그림자'에 은교는 더더욱 그러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점점 더 추워지고 있는 우리 세상이다. 겨울이 되어서가 아니라 겨울이 되어도 기댈 사람 하나 찾는 것이 더욱 어려워 졌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몹시 차가운 따뜻함'이 필요하다. 우리 세상 곳곳에 퍼져있는 아픈 사람들을 보며 아프지 않냐고 물어보고, 따스하게 다가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럼 이 추운 겨울도 황정은의 소설처럼 과정은 차가웠을지라도 더 따뜻한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도서>
『百의 그림자』, 민음사, 2010년 作
『맨발로 길목을 돌다-2011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 2011년  作
 『마더』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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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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