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Beauty Beyond Beauty, 오드리 헵번 전시회[시각예술]

글 입력 2015.02.18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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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uty Beyond Beauty
오드리 헵번 전시회




김지현 글(ART Insight 서포터즈 3기)




전시회정보포스터.png


1. 기간
   2014.11.29 ~ 2015.03.08

2. 시간
   월, 화, 수요일 : 11:00 ~ 19:00 (입장 마감 18:00)
   목, 금, 일요일 : 11:00 ~ 21:00 (입장 마감 20:00)
   토, 공휴일      : 10:00 ~ 21:00 (입장 마감 20:00)
   휴관일: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29, 01.26, 02.23)

3.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알림터 2관

4. 도슨트 안내
   월~금 오후 2시, 4시 도슨트
   토요일 오전 10시30분에 최요한 감독님의 특별 도슨트가 있습니다.
   (일정 변경이 있을 경우 공식 페이스북에 공지합니다.)
    
5. 오디오 가이드
   앱 이용 : 2,000원 / 기기 대여 : 3,000원
   안내 데스크 오디오 가이드 창구

6. 티켓가격
  성인 (만 19세~64세) 13,000원
  대학(원)생 11,000원
  청소년 (만 13세~18세) 10,000원
  어린이 (48개월~만 12세) 8,000원 

7. 할인
    단체할인(포스터 참조)
      〈온라인 예매 가격〉
    성인 → 12,000원 
    대학(원)생→ 10,000원
    청소년→ 9,000원 
    어린이 → 7,000원

8. 예매
    인터파크

9. 문의
주최: (주) 키라임 미디어 / Audrey Hepburn Children's Fund
문의: 02-546-3834 







오드리 헵번, 이 유명한 이름은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나도 1년에 한번은 꼭 이 이름을 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단지 누구인지는 잘 몰랐다. 광고나 예술작품에 자주 등장했던, 머리를 틀어올리고 담뱃대를 문 그 여자가 오드리 헵번이라는 것도 후에야 알게 되었다.


오드리 담배.jpg

오드리 헵번-'티파니에서 아침을'


별 관심도 없던 내가 오드리 헵번의 열성 팬이 된 것은 “점핑 위드 러브” 전시회 때문이었다. 사진작가 ‘필립 할스만’이 찍은 여러 셀레브리티들의 점핑샷 사진전이었는데, 그 중 오드리 햅번의 점핑컷이 가장 눈에 띄었다. 장난끼 많은 표정에서 드러나는 발랄함, 크게 뻗은 팔다리에서 보이는 에너지와 대비되는 얌전한 옷이 인상적이었다. 


점핑 위드 러브.jpg

필립 할스만의 '점핑 위드 러브' 전시회


이번에 한국에서 열린 오드리 헵번 공식 전시회는, 그녀의 매력을 좀 더 깊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Beauty Beyond Beauty", 그녀다운 전시회 명칭이었다. 그녀의 삶은 정말 드라마틱했다. 영화만큼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던 그녀, 그 와중에도 빛을 발했던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인생을 들여다봐야 한다. 


전시회.jpg


오드리 헵번은 1929년 5월 4일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헵번은 어릴 적, 굉장히 깡마른 체격과 소심한 성격을 가진 소녀였다. 그녀는 5살 때 영국으로 건너가서 기숙학교를 다녔는데,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단점을 발레를 배우면서 극복해나가기 시작한다. 


오드리 어릴적.jpg

오드리 헵번의 어릴 적 사진


그렇게 발레리나의 꿈을 키우던 중, 제 2차 세계대전을 겪는다. 헵번은 위험을 피해 네덜란드로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아버지와 오랫동안 이별하게 되고, 이모부의 사형장면까지 목격한다. 또한 전쟁의 여파로 인하여 죽을 때까지 계속 병을 안고 살게 된다. 전쟁은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첫 번째 굴곡임과 동시에 인도적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그녀의 전쟁에 대한 트라우마는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훗날「안네의 일기(1959)」의 캐스팅 제안이 들어왔을 때, 나치 치하에서의 암울한 기억 때문에 거절할 정도였다. 
하지만 배가 고파 튤립 구근을 먹을 정도로 힘들었던 이 때, 그녀는 유니세프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훗날 그녀의 인도적인 행보에 가장 크게 기여한 동기였다. 최대의 트라우마인 동시에 최대의 구원을 받은 셈이다. 

전쟁의 상흔을 안고 자란 헵번은 발레를 유일한 해방구로 삼아 발레에 매진했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앗아간 전쟁의 비인간성에 대항하여 몰래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발레 공연의 수익으로 레지스탕스를 돕기도 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발레리나의 꿈을 가지고 영국을 찾지만, 이미 발레를 하기에는 너무 성장해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발레 대신 모델 업무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가고 단역으로도 몇 번 영화나 CF에 출연했다. 이것이 배우생활의 시작점이었다. 그녀는 뮤지컬 '지지(GiGi)' 원작자 콜렛트의 눈에 떠서 뉴욕의 뮤지컬 지지의 주연을 맡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를 선두로 엄청난 흥행 기록을 내세운 오드리의 대표작, ‘로마의 휴일’ 주연을 맡게 되고 그녀는 월드스타가 되었다. 


지지, 로마의 휴일.jpg

뮤지컬 '지지'


로마의 휴일.jpg

'로마의 휴일' 한장면


‘로마의 휴일’ 을 촬영하면서 그녀는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만난다. 촬영장에서 어느 소년이 오드리에게 팬이라며 악수를 청한다. 그녀는 악수에 응해주었고, 그 소년은 집에 가서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나는 자라서 꼭 오드리 헵번과 결혼할 거에요.” 그 사람이 바로 오드리 헵번의 두 번째 남편, ‘안드레아 도티’ 이다.


오드리의 사랑과 결혼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하늘은 그녀에게 아름다움과 재능, 올곧은 성품을 준 대신 그만큼의 대가도 주었다. 먼저 그녀는 첫 번째 남편, 배우이자 감독이었던 ‘멜 페러’와 결혼하지만 스트레스와 과로로 인해 아이를 두 번이나 유산한다. 평범한 가정과 아이를 너무도 갈망했던 그녀에게는 크나큰 슬픔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첫 아들 ‘숀’을 갖게 되었지만 아이를 얻는 대신 그녀는 남편을 잃게 된다. 동종업계에서 자신보다 뛰어난 아내에게 늘 위축되던 남편과 이혼한 것이다. 오드리는 "이혼은 인간으로서 실패며 패배이다." 라고 할 만큼 좌절감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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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남편 멜 페러와의 사진


그리고 이 슬픔을 달래기 위해 여행을 갔을 때 만난 것이 운명적인 인연, '안드레아 도티‘였다. 첫 남편 멜 페러와 달리 오드리의 유명세를 즐겼던 도티는 배우 오드리의 모습을 좋아했다. 그와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일을 하러 갔을 때마다 포착되는 외도 모습에 결국 그와도 이혼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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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도티와의 결혼


첫 남편은 헵번의 유명세를 견디지 못하고 이혼했고, 두 번째 남편은 유명세를 즐기다 선을 넘고 헤어졌다. 그동안 유산도 세 번이나 경험한다. 여자의 삶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결혼과 출산에 굉장한 고통을 수반한 것이다. 배우로서 전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여자가 한 남자의 여자로서는 원하는 사랑을 얻지 못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난이 그녀에게 초석이 되어 준 것일까. 그녀는 다시 새로운 사랑의 순환 속에서 살게 된다. 그녀를 가장 아름답게 해주었던 사랑이었다.
바로 유니세프 친선대사 활동이다.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 세계의 아픈 아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줬다. 극한의 두려움 속에 살았던 전쟁 시기에 그녀가 유니세프 구호물품으로 희망을 찾았던 경험을 잊지 않고 다시 그 희망을 세계에 전파시켰다. 전쟁 때 얻은 병으로 인해 24시간 내내 모르핀을 맞고 있어도 그녀는 쓰러지기 직전까지 수단, 엘살바도르, 방글라데시, 베트남, 과테말라, 타이, 케냐, 소말리아를 순회하며 연봉 1달러만을 받고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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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세프 친선대사로서 활동하는 오드리


그러한 그녀 옆에서 사랑을 줬던 사람이 로버트 윌더스였다. 오드리는 두 번의 이혼 후, 결혼이 사랑이나 안정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로버트와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오드리는 사랑보다 견고한 무언가를 갈망했다. 왜 월더스와 결혼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오드리 헵번은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 결혼식이 우리가 이미 서로에게서 얻고 있는 것에 어떤 것도 추가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랑에 대한 틀을 깨고 나와서였을까, 월더스는 오드리가 죽는 순간까지 그녀 곁에 남았고 그녀는 진정한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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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윌더스와 함께


근면성실하고 책임감 넘치며 겸손하고 예의바른 성격에, 자신이 중시하는 것을 지키고자 하는 순수함까지. 그녀의 부지런한 성격과 순수함은 모든 사람들의 심장을 관통시켰다. 작품에서도 그녀의 이미지가 잘 드러났기에 호평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스타로 일약한 그녀가 유니세프 봉사활동을 자진해서 한다고 발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코웃음쳤다. 이미지 메이킹이라고 생각하며 그녀의 의도를 왜곡시켰다. 하지만 그녀는 진심이 전달 될 때까지 꾸준히, 묵묵히 봉사활동을 했다. 나서는 것을 싫어해 배우 때 꺼리던 인터뷰를 유니세프를 위해 자진해서 하고, 5개국어가 가능한 그녀의 능력을 십분 활용해 스피치를 하며 봉사에 관심없는 정치인들까지 감동시켰다. 그녀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선구자였고 스타들의 봉사활동에 앞장선 퍼스트 펭귄이었다.



5개국어로 인터뷰하는 오드리 헵번


단언컨데 오드리는 20세기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가장 사랑받는 여인이었다. 비단 그녀의 외모적인 아름다움에 사람들이 끌려서가 아니었다. Beauty Beyond Beauty, 외모의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그녀의 내면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전시회에서 많은 것을 남기고 간 그녀의 흔적을 좇으며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찾아나가고 있었다.


늙은 오드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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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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