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지형의 음악극 The Home [공연예술]

글 입력 2015.02.03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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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형의 음악극, 더 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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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편의점 봉투를 든 '지형'이 작업실인 무대에 등장한다. 짐을 정리하고, 외투를 벗고, 가습기를 틀고, 커피를 내리고, 전화를 받는다. 그렇게 아주 일상적인 모습으로 더 홈은 시작된다. 

지형은 록 밴드 글로발의 해체 이후 13년째 솔로 데뷔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 작업실에 오는 지형의 동료는 세 명이다. 베이스의 '근호', 피아노의 '영조', 그리고 드럼의 '민석'이다.  

록 밴드 글로발의 유일한 추종자인 근호는 지형의 작업실에서 허드렛일을 한다. 지형이 두루마리 휴지 2개와 10리터짜리 쓰레기 봉투 3개와 저지방 우유의 심부름을 시키면서 돈은 주지 않는다. 돈을 달라는 근호의 말을 기타 연주로 튕겨낸다. 섬세하고 능청맞은 성격의 영조는 등장부터 남달랐다. 가방에서 컵을 꺼내고 파인애플도 꺼낸다. 파인애플의 잎사귀를 난초마냥 닦았다. 민석은 긴 비밀번호를 자꾸 틀려 작업실에 들어오지 못하다 겨우 성공했다. 번호 좀 바꾸면 안되냐고 투덜거리고, 지형은 그걸 못 외우냐고 타박한다. 인물소개의 '애증'이라는 말처럼 투닥거리고 아웅다웅한다. 

민석이 틀린 비밀번호는 17자리다. 일상적이지 않은 자릿수다. 더 홈에선 일상의 조각들과 17자리의 비밀번호처럼 일상적이지 않은 장면들이 섞여있다. 


"음악 하는 사람들만의 일상과 습관, 농담, 나아가 말 못 할 고민까지 관객 앞에서 보여 주고 싶어졌습니다."
 
가령 이런 장면이 있다. 빗소리가 들리고, 지형은 '비가 오면'을 흥얼거린다. 그러다가 드럼에 조명이 켜진다. 민석에겐 감정이 너무 없다고 타박하다가도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치면 돼"라는 디렉션을, 근호에겐 "사람들은 베이스를 안 들으니까 상관 없어", 영조에겐 비 내리는 소리를 부탁하며 "미 플랫에선 여름 장마 느낌이잖아. 솔 샵에서 네가 2014년과 2015년으로 넘어가는 언저리의 느낌을 잡아야 해"라는 까다로운 주문을 내린다.

민석이 지형을 신경 써서 아이돌 쌰이니의 월드 투어의 코러스와 기타 자리를 마련했는데 융통성 없는 지형은 자기가 백밴드나 해야겠냐며 민석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민석은 지형을 열심히 꾀지만 신념을 고수하는 뻣뻣한 지형을 꺾지 못하고 결국 둘은 큰 소리를 내게 된다. 하지만 이런 갈등은 오래가지 않는다. 

민석이 자신을 가르키려고 든다는 지형에게 "가르키는 게 아니라 가르치는 거지."라고 답하며, 지난 공연에 대해 성토하는 지형에게 "노래 한 곡을 부르는데 삑사리가 8번이나 났잖아. 관객 반응이 있으면 이상하지. 있었으면 대중 매체가 잘못 된 거야", "빰빰빰의 가사 반이 빰빰빰인데 이건 가사 쓸 정성이 없다는 거지."라면서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는 것으로 관객들의 웃음을 유도한다. 

'음악'극이기 때문에 갈등과 갈등의 해소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이입하고 인물에 동화되는 극의 측면이 배제되고, 물 흐르듯 잔잔하게 흘러가기 때문에 가뿐한 마음으로 공연을 즐길 수 있었는데 누군가에겐 이런 점이 아쉬울 지도 모르겠다.


게스트와 관객과 함께 만들어내는 다양한 상황

더 홈의 주목해야 할 점 하나는 매 회 다른 게스트가 등장한다는 것. 내가 보러 간 날은 케이팝스타에 출연한 권진아양이 나왔는데, 역할은 지형에게 기타레슨을 받는 입시생이었다. 지형이 뭐라고 하든 한 귀로 흘려보내고 핸드폰만 들여다 보는 말 안 듣는, 주위에 있을 법한 귀여운 여고생이었다. 지형이 진아의 초코우유 주문을 받고 사러 나가면 진아는 지형의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다.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극에 등장한 게스트는 콘서트에 등장한 게스트가 된다.  

지형은 어떤 노래의 간주부분에 객석으로 내려가 극중 9시에 기타 레슨을 받으러 오기로 한 레슨생을 골라 무대 위로 데리고 온다. 어쩌다 보니 레슨생이 된 관객을 소파에 앉혀두고 지형은 근호에게 78도에 맞춰 생강차를 내오라고 시키고, 멤버들은 지형을 방해하기 위해 격정적으로 드럼과 피아노를 연주하고, 뒤에서 라면을 부수어 먹으며, 느닷없이 청소를 시작한다. 정신 없는 상황에 레슨생은 어리벙벙해진다. 그러나 지형이 레슨생을 위해 노래 한 곡을 불러주면서, 당황은 만족으로 탈바꿈한다.


비슷한 일상. 그래서 공감, 그리고 위로

집을 옮겨놓은 것 같은 친숙한 무대와 우리의 생활과 닮아있는 지형의 일상이라고 해서 그냥마냥 잔잔한 것만은 아니었다. 별 일 없이 지나간 하루나 일주일이라고 해서 아무렇지 않았던 날들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앵콜 전 마지막 곡은 이지형의 3집 앨범 청춘 마끼아또의 수록곡 청춘표류기였다. '파란 하늘 밑 구겨져 버린 밤 난 어떤 꿈을 꾸는 걸까', '언제부터인가 어두워진 표정 점점 시들어가는 인생', '차가운 바람에 주윌 둘러보면 어느 것 하나 내 것일 수가 없나' '난 너무 힘들어 자신이 없어'라는 가사에서 길을 잃고 허허로운 청춘이 느껴졌다.  
더 홈이 청춘을 말하는 것도, 힘든 삶을 드러낸 것도 아닌데 청춘표류기를 듣는 순간 더 홈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낯설지 않고 날 서지 않은 공연의 흐름을 따라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너도 힘들지? 나도 힘들어'라는 한 마디를 들었다. '너'도 '나'도 위로를 의도하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위로를 받는 순간이었다.

2시간 20분, 잔잔한 물에 몸을 싣고 늘어져있다가 78도라는 화끈하지도 냉랭하지도 않은 적당한 위로를 받고 몸을 일으켰다.


-Set List-
사랑은 가고
DUET
Nobody Likes Me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이적 cover)
같이 걷고 싶었어
Beatles Cream Soup
Happy Birthday to You
아름다웠네
솔직히 말해도 될까
비가 오면
청춘표류기
봄의 기적


-참고 사항-
1) 드럼의 강민석, 피아노의 임영조, 베이스의 송근호는 실제로 이지형과 함께 활동하는 동료들이다.
2) 이지형은 인디 1세대 밴드인 위퍼의 멤버였다. 무대 오른쪽 벽에 지형과 민석과 함께 GLOBAL이라고 적혀있는 포스터는 위퍼시절의 모습이다.
3) 지난 30일부터 개인적인 사정으로 '영조'가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4) 이지형은 '해피 버스데이 투 유'라는 곡을 관객과의 이벤트를 염두하고 만들었다고 했다. 레슨생을 찾으러 객석에 내려가는 것은 '해피 버스데이 투 유'의 간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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